일본 정부가 무상으로 배포했던 천 마스크. 사진 AP연합
일본 정부가 무상으로 배포했던 천 마스크. 사진 AP연합
이진석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이 나라(일본)의 민주주의는 형태만 갖추면 돼.”

4월 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43회 일본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심은경이 영화 ‘신문기자’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속 내각정보조사실장 타다(다나카 데쓰시 분)의 이 대사가 총체적 난국을 맞은 일본 사회에 던지는 울림이 크다. 이 영화는 일본에서 보기 드문 사회 비판 메시지를 담아 조용한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사학 비리 스캔들을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아베 총리는 역대 최장수 재임 총리 기록을 경신하고 있지만, 최근 취임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국가 위기 상황이 그의 민낯을 들췄다. 아베 총리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은 어설펐고, 비난이 빗발치고 있다. 가구당 배포된 천 마스크 두 장부터 가정 붕괴를 낳은 갑작스러운 휴교 정책, 손발이 맞지 않은 중앙정부와 도쿄도의 코로나19 위기 대응책, 인기 가수 호시노 겐(星野源)의 외출 자제 노래 영상에 숟가락을 얹다 맞은 역풍, 코로나19 감염 확산 긴급 기자회견 다음 날 여행을 떠난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昭惠·58) 여사, 기준이 오락가락한 보조금 지급까지. 불과 1개월여 만에 이뤄진 아베 총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구설에 오르내리고 조롱의 대상이 됐다.

일본 정부가 코로나19 대책으로 강하게 추진 중인 신종플루 치료제 ‘아비간’ 비축 방침은 국유지 헐값 매입 논란이 일었던 모리토모(森友) 학교 비리 스캔들의 후속타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아비간에 대한 안전성과 효과가 검증되기도 전에 이 약의 비축량을 200만  명분까지 늘리기로 한 데다가 미국 등 타 국가 홍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제약사가 아닌 총리 스스로가 ‘영업’을 펼치는 것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비간을 생산하는 후지필름의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 회장은 아베와 연말연시 등에 골프를 치는 막역한 사이다. 아비간의 주원료를 생산하는 우베흥산의 공장은 아베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에 있다. 우베흥산은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장남 노부카즈(아베의 외숙)가 생전 근무한 회사다. 1991년 그의 장례식장에서 우베흥산 당시 사장인 시미즈 야스오(清水保夫)가 “신조씨에게 반드시 우리의 힘을 빌려주겠다”는 추도사를 남겼다. 일본에서는 어지간히 막역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성(姓) 대신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일본 정부가 무상으로 배포했던 천 마스크는 낮은 품질과 이물질 혼입 논란으로 ‘아베노마스크(아베의 마스크)’라는 놀림거리로 전락했다. 천 마스크의 생산·조달을 담당한 코우와(興和)와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아키에 여사의 관계에도 시선이 쏠린다. 이 회사는 마스크 생산을 미얀마 공장에서 진행했다. 아소 부총리는 일본-미얀마 협회 최고 고문을 맡고 있다. 미얀마 교육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릿쿄대 석사 학위를 딴 아키에 여사는 지금껏 수십 차례 현지를 방문한 ‘미얀마통’이다. 그는 일본에서 매년 5월 열리는 ‘미얀마 축제’의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아베 정부의 행보는 일본 민주주의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베 총리는 2018년 국회에서 “나는 입법부(행정부의 오인)의 장(長)”이라는 말실수를 했다. 어쩌면 실수가 아닌 본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4월 17일 총리 관저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관련 기자회견에서 “외출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진 AP연합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4월 17일 총리 관저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관련 기자회견에서 “외출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진 AP연합

아베 총리는 모리토모 스캔들에 연루되어 자살한 공무원이 ‘윗선 지시’를 시인하는 유서를 남겨 사태가 재점화하자 자신의 측근인 구로카와 히로무(黑川弘務) 도쿄 고등검찰청 검사장의 정년을 연장하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독립성이 요구되는 ‘호헌의 보루’ 내각 법제국과 ‘곳간지기’인 회계 검사원이 아베 정권의 추인기관으로 전락했다. 수상관저가 주도하는 톱다운(Top-down)에 염증이 난 엘리트 관료들은 줄줄이 사표를 내고, 공무원은 이제 비인기 직종이 됐다.

실정(失政)과 독단, 갖은 유착 의혹으로 뒤덮인 아베 정권의 폭주는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일본 국민의 임계점을 시험하고 있다. 고착화한 세습정치와 문제투성이인 선거제도, 허울뿐인 민주주의와 위태로운 헌법이 전 국가적인 스트레스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파열음을 낸다.

일본이 어떤 나라인가. 그동안 일본 국민은 조금만 규율을 벗어나면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하고 관(官)이 민(民)을 주도하는 구조에 큰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수대에 걸쳐 이어지는 정치 가문의 권력 승계는 일본인에게 있어 가업을 잇는 것과 같은 당연한 흐름이었다. 주어진 일과 쥐어진 것에 순응하고 항쟁을 주저하는 국민성이 전후 수십 년을 이어온 일본의 정서다.

그런데 정말 일본인은 순응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수백 년을 이어온 막부를 끌어내린 메이지 유신을 설명하기 어렵다. 1960년대 말 일본 전역에서 일어난 대학 학생운동인 전학공투회의의 무력시위는 또 어떤가.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와(和‧어우러짐)’의 정신은 도망갈 곳이 바다뿐인 섬나라 안에서의 동족학살을 막기 위한 자구책이 근간이다. 불교의 전래 과정에서 겪은 내전이 남긴 교훈을 쇼토쿠 태자가 국혼(國魂)으로 삼았다.

일본의 민주주의가 빛을 발하던 시기는 너무도 짧았다. 1910년대부터 십수 년에 걸친 ‘다이쇼 데모크라시(일본의 민주주의 개혁운동)’는 군부 정권과 파벌 정치에 들고 일어난 민중이 기존의 사회구조와 질서에 저항해 활발히 벌이던 사회운동이었다. 당시 보통선거에 의한 내각제 민주주의의 기틀이 잡혔고 일본공산당이 창당됐다. 신(神)으로 여겨지던 일왕이 국가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관에 불과하다는 ‘천황기관설’이 지지를 얻었고, 호헌주의가 확산됐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제2차 세계대전과 군국주의로 막을 내렸다. 전쟁에 진 일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두지 않았다. 국민은 정부 규제보다는 화합의 균형을 토대로 한 사회적 규범을 지키는 형태로 정치와 거리를 뒀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무관심은 역대 최장수 총리의 폭주로 돌아왔다. 이제야 정말로 모처럼, 일본 사회 전반에서 ‘형태뿐인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자민당 외에는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지한다’는 소극적 지지에 대한 회의감이 불거지고, 친(親)정부 성향의 언론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제1 야당인 입헌민주당은 지난해 총선 슬로건으로 ‘레이와 데모크라시’를 뽑아 들었다. 레이와(令和·새 일왕의 연호)를 기점으로 다이쇼의 민주주의를 다시 일깨우겠다는 목표다. 다만 민주당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일본 국민은 많지 않다. 대안의 부재는 비상사태의 다른 말이다. 오히려 자민당의 ‘반(反)아베파’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 간사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우익정당인 일본유신회나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가 코로나19 실정의 수혜를 누리고 있다.

일본 정계에서는 내년 9월 임기가 만료되는 아베 총리의 ‘조기 퇴진설’이 무르익고 있다. 총리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는 선거제도를 이용해 아베 총리는 최상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잠식이나 도쿄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가 그 신호탄이 될 것이다. 이뤄지지 않는다고 해도 기점은 온다. 아베 총리의 임기 만료, 조짐을 보이는 대공황, 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스캔들이 머잖아 일본 국민에게 현혹과 심판 사이를 가를 기회를 줄 것이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는 일본의 민주주의는 깨어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형태로 남을 것인가. 레이와 시대(2019년 5월 1일~)는 이제 갓 한 해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