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이승범>

1991년 12월, 미국 언론들이 진주만 침공 50주년 특집을 요란하게 쏟아냈다. 미군 함정이 불길에 휩싸여 침몰하는 장면을 연일 내보내면서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일본의 경제공습을 맞아 미국을 잠에서 깨울 ‘웨이크업 콜(자명종)’을 울려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반일(反日) 감정이 실린 ‘재팬 배싱(일본 때리기)’ 열풍이었다.

당시 미국은 제2의 진주만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해 대일 무역적자가 500억달러에 달했다. 미쓰비시가 뉴욕의 랜드마크 빌딩인 록펠러센터를 사들였고 주요 기업의 주인이 일본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정신을 상징한다는 콜롬비아 영화사마저 소니에 넘어가자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일본 위협론이 고조되는 속에서 미국 정부는 대일 통상압력 수위를 최고조로 올렸다.

통상갈등은 미·일 간 구조문제 협상으로 이어졌다. 부시 정부는 미국 제품의 수출을 막는 구조적 장벽을 철폐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의 배타적 거래관행과 폐쇄적인 유통 제도 등을 놓고 두 나라가 2년간 협상을 벌였다. 일본은 저항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형태로 협의가 마무리됐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몰락한 것은 미국 압력이 아니라 일본의 내부적 모순 때문이었다. 저금리에 따른 기형적인 주식·부동산 버블이 1990년대 들어 일거에 붕괴됐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의 장기불황에 접어든 반면 미국은 디지털 혁신에 올라탄 신경제를 통해 부활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의 재팬배싱은 ‘기업 배싱’으로 펼쳐지는 경향을 보였다. 2009년 도요타가 미국에서 판매한 일부 차량에서 급발진 사고가 발생했다. 도요타는 가속페달이 매트에 걸리는 등의 ‘기계적’ 결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 언론과 소비자단체 등은 전자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몰아갔다. 미국 의회도 청문회를 열어 도요타 때리기에 가세했다. 도요타에는 소비자 안전을 위협하는 ‘악덕기업’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1년여 뒤 미국 교통부의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반전이 이뤄졌다. 보고서는 급발진의 원인이 전자적 결함이 아닌 기계적 문제였다고 발표했다. 도요타의 당초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도요타는 이미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미국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온 미국 사회가 ‘도요타 배싱’에 나섰던 셈이었다. 이번엔 ‘삼성 배싱’이다.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7(노트7) 발화 문제를 놓고 미국 언론 등이 연일 삼성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근래 가장 두려운 사건이었다. 노트7의 명복을 빈다”고 썼다. 뉴욕타임스는 “세탁기 같은, 삼성의 다른 제품도 결함이 있으며 리콜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언론은 노트7에 대한 비아냥거림부터 리콜 과정에서 신중하지 않았다는 문제점 등을 쏟아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공통점은 제품 우수성에 과대망상을 가진 점”이라고 삼성 수뇌부까지 공격했다. 중국 언론도 가세했다. 국영 CCTV는 “삼성이 중국 소비자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제2의 블랙베리로 전락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중국 언론의 비판엔 사태를 과도하게 부풀리거나 감정이 얹힌 대목이 섞여있다. 이번 기회에 스마트폰 세계 1위인 삼성의 기세를 꺾자는 의도가 엿보인다. 노트7의 단종으로 반사이익을 얻는 것이 미국 애플과 중국 화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미·중의 애국주의 정서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여론몰이를 당하는 것은 1등의 업보다. 공격의 타깃은 1등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그만큼 경쟁자들에겐 삼성의 실력이 무섭다는 얘기다. 삼성이 더 강해져서 극복해내는 방법밖에 없다. 삼성의 저력이라면 충분히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박정훈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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