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가속화로 노골화되는 중국의 경제 보복을 두고 말들이 많다. 중국이 언행일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과 대국(大國)답지 못하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유교(儒敎)의 나라와 맞지 않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지적들은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입에 달고 다니는 “중국은 개방의 큰 문을 영원히 닫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한류(韓流) 콘텐츠를 차단하고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에 영업정지 등의 규제를 가하는 행동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의 언행 불일치는 사드 보복만이 아니다. 시 주석은 2013년 10월 주변외교업무간담회에서 “주변국과 친(親)하게 지내고 성의(誠)를 다하며, 중국의 발전 혜택(惠)을 나누면서 포용(容)하겠다”는 ‘친·성·혜·용’의 개념을 확실히 구현하라고 강조했다. 같은 달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한 연설에서도 “중국과 일부 동남아 국가들 사이에 나타나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은 당사국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와 우호적인 협의를 통해 처리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 한 달 뒤 중국 국방부는 동중국해에 대한 방공식별권 설정을 발표하고, 2014년엔 하이난성(海南省)이 남중국해에서 조업하는 외국 어선에 성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해 5월엔 중국 군함의 호위하에 원유 시추 장비가 남중국해에서 굴착을 시작했고, 이에 항의하는 베트남 선박과 잇따라 충돌했다. 작년 11월엔 중국이 반체제 인사로 지목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초대했다는 이유로 일대일로 협력국인 몽골에 통관세를 물리는 등 규제를 가했다.


외교 수단으로 경제 징벌 가한 사례 많아

대국답지 않다는 비판은 “경제 제재라는 도구는 대국이 소국에 쓰는 것(중국 관영 환구시보)”이라는 인식과 괴리를 보인다. 중국은 명나라 정화(鄭和)의 해외 원정을 평화적 해양 진출로 묘사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반체제 세력을 쫓고 조공(朝貢)질서를 요구하기 위한 행보였다고 분석한다. 스리랑카 박물관에 가면 “우리들은 정화한테 침략당했다”는 글도 볼 수 있다. 대국이 외교 수단으로 경제적 징벌을 가한 사례는 중국만의 전매 특허가 아니다.

당장 미국이 3월 7일 북한·이란 제재법 위반 혐의로 중국 2위 통신장비 업체인 국유기업  ZTE에 벌금 11억9200만달러(약 1조3702억원)를 부과한 것이나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확대하는 게 대표적이다. 1962년 당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에 반발한 미국의 쿠바에 대한 경제 봉쇄 역시 마찬가지다. 사드 보복은 사실 정치와 경제의 경계선이 없는 현실 외교의 단면일 뿐이다.

‘유교의 나라가 어떻게…’라는 반응 역시 늘 생존의 벼랑 끝에서 살아온 탓에 국가 간 합종연횡(合從連衡)과 손자병법에 익숙한 중국인의 사유방식과 괴리된다. 사드 보복은 과도하게 중국에 의존한 한국 경제의 리스크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외교가 과도하게 미국에 의존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경제와 함께 외교의 지평을 합종연횡식으로 넓히는 게 더 단단한 경제·외교적 방패를 갖는 것이다.

경제와 외교의 다변화는 물론 일정 세월을 요구한다. 사드 문제를 당장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냉소가 나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교훈을 잊어서는 또다시 제2, 3의 사드 보복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

사드 보복에 비친 중국의 거친 모습이 전 국민으로 하여금 냉혹한 외교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외교 감각이 없는 민족은 필연적으로 조락한다(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의 정치고문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는 경고의 울림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