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장기 저인플레이션과 관련한 충격이 조만간 현실화할 전망이다. 미국의 근원 물가지수의 상승률은 매년 하락세다. 지난 5월 근원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1.7% 상승해, 사실상 거의 변동이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국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물가의 심각성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했다. 미국 노동 시장이 완전 고용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우리는 저인플레이션과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지금까지 2%대 인플레이션 회복을 외쳐온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 디플레이션(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지난 4월 일본의 근원 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비슷한 수준을 기록했다. 도쿄 역시 지난해와 비교해 비슷한 물가를 유지했다. 일본은 1994년부터 19년 동안 총 16.5%의 물가 하락을 경험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례없는 통화 정책을 펼친 일본은행(BOJ)의 반성만으로는 부족하다. 패배에 가까운, 부끄러운 일이었다.

세계적인 저인플레이션은 지금 경제의 가장 큰 문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우 통화 압력(파운드 약세)으로 지난 4월 근원 물가지수가 전년 대비 2.4% 올랐다. 말레이시아는 정부가 연료 보조금을 없애면서 근원 물가지수가 2.5% 상승했다. 하지만 이는 전반적인 글로벌 경제 기조의 예외일 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인플레이션이 평균 2% 미만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돼”

인플레이션 혼돈은 과거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자산 거품과 통화 억압을 위한 지나친 레버리지(차입), 기업 생산성 손상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경제적 난국은 이제 잃어버린 10년에서 25년으로 길어지고 있다. 경제 규모가 크고, 부유한 나라에서도 이렇게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따라서 일본은행이 저지른 일련의 실수를 반드시 숙지해서 답습하지 말아야 한다. 한때 세계의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은 무분별한 금리 정책 때문에 무너지고 말았다. 일본의 중앙은행은 경제 회복을 위해 정책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췄고, 양적 완화 정책을 시행하고, 장기 금리를 조작함으로써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쉽게 탈출할 수 없는 미로 같은 상황에 빠져버린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이후로 일본의 경험은 많은 교훈을 줬지만, 나머지 국가는 일본의 사례를 제대로 연구하고 배우지 않았다. 일본 경제를 연구하는 많은 책이 출간됐고, 셀 수 없이 많은 학회가 열렸으며,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이 “절대 일본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까지 했지만 시간이 지난 현재, 연준과 유럽중앙은행(ECB)이 빠른 속도로 일본은행의 전철을 밟고 있다.

올해 저인플레이션은 세 가지 핵심 통찰력을 제공한다. 첫째, 인플레이션과 경제 불황의 관계를 설명하는 전통적 이론인 필립스 곡선(실업률과 물가상승률 간 상충 관계를 보여 주는 곡선)은 무너졌다. 리처드 볼드윈(Richard Baldwin) 제네바 대학 교수의 ‘세계화의 두 번째 가격 분리’ 이론에 따르면 세계는 유례없는 공급을 경험하고 있다. 수많은 도시별로 쪼개진 공급 체인별 아웃소싱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게 되면서 글로벌 공급 곡선의 가격 탄력성이 강화됐다. 예를 들어 A 도시에서 영업하던 전자부품 회사가 과거에 제품 가격을 올렸을 때 매출이 늘어난 것과 달리, 이제는 제품 가격이 조금만 올라도 판매율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 결과 노동 시장과 수요 곡선의 탄력성뿐 아니라 인플레이션에 대한 영향도 달라졌다.


소비자가 줄고, 아마존 등 전자상거래와 공급 경쟁에서 고전해온 미국 최대 백화점 메이시스는 올해 매장 68곳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사진 : 블룸버그>
소비자가 줄고, 아마존 등 전자상거래와 공급 경쟁에서 고전해온 미국 최대 백화점 메이시스는 올해 매장 68곳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사진 : 블룸버그>

소비는 줄고 공급은 늘어

둘째, 오늘날 세계화의 공급과 수요 곡선은 본질적으로 비대칭이다. 일본과 미국의 대대적인 경기 침체로 인한 여파, 비관적인 경기 전망 때문에 위축된 중국의 투자와 기업 생산성이 제한되면서 극도로 절제된 유럽의 소비 등 주요 경제국의 소비가 심각하게 손상됐다. 줄어드는 소비와 대조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공급만 놓고 봐도 디플레이션은 당연한 결과다.

셋째, 중앙은행은 갑자기 발생하는 유동성 함정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가 발견한 사실이다. 정책 금리가 제로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만성적으로 부족한 총수요를 중앙은행이 자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결국 오늘날 가장 큰 경제 문제는 끊임없이 올라가는 글로벌 공급 곡선이다. 이 때문에 중앙은행은 1930년대보다 더 무능력해졌다. 물론 저인플레이션이 불치병은 아니다. 세계화의 시대(도널드 트럼프와 보호무역주의자를 제외하고)에 경기를 부양하기 위한 정책은 수요를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1930년대와 근래 일본의 경험을 미루어 볼 때 통화 정책이 만성적 수요 부족의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주로 재정 당국의 몫이다. 즉,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촉진시키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펼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한편,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은 금리가 정상화하도록 힘써야 한다. 유례없는 통화 완화 정책은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 시장에 많은 유동성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자산 버블로 이어지고, 무모한 리스크 부담이나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양적완화 정책이 경제 비상 사태를 위해 고안됐기 때문에 연준이 다음 위기를 넘길 다른 방법이 더 이상은 없다.

우리는 커다란 위험 앞에서 종종 역사의 교훈을 간과한다. 최근 중앙은행의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 실패는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장기 금리 하락도 마찬가지다. 일본 경제가 준 교훈을 주의 깊게 공부해야 한다.


▒ 스티븐 로치(Stephen Roach)
뉴욕대 경제학 박사,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연구원, 모간스탠리 아시아지역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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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 물가지수(core CPI)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식료품과 에너지(유가)를 제외한 물가지수다. 식료품과 에너지는 날씨, 국제 유가등 일시적인 외부 충력에 의해 물가 변동이 심하다. 이런 품목을 제외한 장기적인 물가를 말한다. 필립스 곡선(Phillips curve) 영국의 경제학자 앨번 윌리엄 필립스가 1958년 발표한 이론으로,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더 높은 물가상승률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정부가 실업과 물가상승을 동시에 해결하려는 것은 과욕이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