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7월 13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엘리제 궁에서 열린 연례 공동 각료회의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7월 13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엘리제 궁에서 열린 연례 공동 각료회의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 : 블룸버그>

다음 달이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10년이 된다. 2007년 8월 9일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프랑스 중앙은행은 미국 담보부사채(mortgage bond)가 포함돼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몇 종의 보유 펀드가 ‘휴지 조각’이 됐다고 발표했다.

그날 이후 자본주의 세계는 제2차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10년 동안 계속된 대공황 이후 가장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몇 주 전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에서 열린 한 경제학 학회에서 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잃어버린 10년’의 시간을 피할 방법은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당시 세션의 주제는 ‘더 이상 새로운 경제 정책은 없나?’였고, 필자와 함께 참석한 패널들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저마다 금융위기 이후 시행됐다면 경기 흐름을 바꿨을지도 모를 경기 부양, 고용, 금융, 분배 정책들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그렇게 아이디어가 많았는데 왜 금융위기 이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을까.

정책 시행을 가로막은 첫 번째 장애물은 만연한 급진적 시장주의였다. 1980년대 이후 서구 정치권에는 ‘시장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정부 개입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독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0년대 높은 물가상승률의 영향으로 통화주의자들 사이에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들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결과였다. 그 여파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힘을 받으면서 세계 경제는 1982년 이후 25년간의 경기 호황기에 접어들게 된다.


급진 시장주의로 심각한 지식적 오류 확산

하지만 급진적 시장주의는 심각한 지식적 오류를 확산시켰다. 금융시장은 언제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목표만 설정하면 족할 뿐 금융시장과 고용 안정에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다는 것, 유일하게 공인된 재정 정책의 역할은 안정적인 경제 성장이 아닌 균형 잡힌 재정 운영이라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오류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런 오류들로 인해 급진적 시장주의자들이 이끌어온 경제는 파탄 났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여전했기 때문에 시의적절한 정책 대응은 불가능했다.

1970년대 급진적 시장주의가 급부상하는 데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정부의 간섭에는 언제나 부작용이 따른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부와 힘의 무게중심이 각각 제조업 종사자에서 금융 자본가로, 노동자에서 경영자로 옮겨갔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공동 주창자인 폴란드 경제학자 미할 칼레츠키(Michal Kalecki)는 이미 1943년에 이 같은 상황 변화를 정확히 예측했다.

그는 당시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지출 등을 통해 유효수요를 만들어냄으로써 고용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조만간 적당한 수준의 실업을 통해 노동자를 길들이려는 비즈니스 리더들과 건전재정을 강조하는 경제학자 등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다시 긴축 정책으로 회귀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건전재정을 강조했던 경제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자유주의 경제학의 지평을 확대한 것으로 평가받는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가 케인스학파에 맞서 이끌었던 급진적 시장주의 혁명은 30년 동안 계속됐다. 하지만 케인스학파가 높은 물가상승률로 신뢰를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급진 시장주의자들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평판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급진적 시장주의의 쇠퇴는 소득 수준 정체와 극우세력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 증진과 규제 완화로 국가의 수입이 늘어나면 분배 정책과 상관없이 언제나 사회 전반에 혜택이 돌아간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의 바탕은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ity)’ 이론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이 언제나 소득이 낮은 사람들을 돕는 방향으로 부의 순환이 이뤄진다. 파레토 최적 이론은 시장경제와 경쟁 체제를 지지하는 학자들로부터 마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받들어졌고, 이런 이유로 경제학자들은 총소득 증가는 어떤 경우에도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 같은 가정이 현실 세계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유무역과 ‘유연한’ 노동 정책의 여파로 고통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를 소득 재분배 정책과 교육·산업·지역 지원 정책이 급진적 시장주의에 가로막혀 시행될 수 없었다면? 만일 그랬다면 파레토 최적 이론 자체를 의심해봐야 한다.

사실 무역이든, 노동시장이든, 국내 제조업이든 간에 경쟁을 극대화하는 정책은 정치·사회적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경제 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부의 ‘불간섭주의’는 국제화와 기술 혁신의 피해자인 취약계층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경제 개혁의 큰 걸림돌이 됐다. 경제 개혁이 성공하려면 통화, 재정정책과 구조 개혁이 논리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방향으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급진적 시장주의가 확장적 거시경제 정책과 소득 재분배를 위한 세제 개혁, 재정 지출 등을 가로막으면서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자유무역과 노동시장 및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극우주의 세력이 힘을 얻게 됐다.

극우 세력의 반대로 구조개혁이 지연되면 결국 확장적 거시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좌∙우 조화 경제 정책이 유럽 경제의 희망

하지만 만일 완전고용과 소득 재분배를 근간으로 하는 진보적 경제 정책이 자유무역과 노동시장 개방의 기치를 내건 보수적 정책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면 확장적 거시경제 정책과 구조개혁 정책이 정치적인 추진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성공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과연 이게 가능할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 기간 중 우파적 노동 개혁과 좌파적 재정∙통화 완화 정책의 조화를 핵심 경제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같은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독일을 비롯해 여러 유럽연합(EU) 국가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좌∙우가 균형을 이룬 이런 경제 정책이 금융위기로 설 자리를 잃은 급진적 시장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면 적어도 유럽에서는 조만간 ‘잃어버린 10년’의 끝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
케임브리지대 수학과, 하버드대 경제학 석사, ‘자본주의 4.0’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