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ECB 본부. <사진 : 블룸버그>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ECB 본부. <사진 : 블룸버그>

유럽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최근 경제가 회복되고 있지만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은 앞으로 다가올 경기 침체기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했다. 유럽의 경기 둔화는 반드시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위기가 닥쳤을 경우 유럽중앙은행(ECB)은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ECB는 지난 몇 년간 세계 경제 발전에 기여해왔다. 2014년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중앙은행장 연차 총회에서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유럽의 경제를 개선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독일 등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국가의 재정 확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구조 개혁, 통화 정책 변화다.

하지만 드라기 총재는 ‘이 방법들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즉, 독일이 유럽을 살리기 위한 재정 적자를 감수하지 않을 것이고,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구조 개혁에 착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때문에 그는 ECB가 금리를 낮춘 후 유로화 약세를 통해 순 수출을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경제 성장을 촉진해야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후 ECB는 2014년 8월 0.2%였던 단기 금리를 -0.3%까지 낮추고, 장기채권 매입에도 나섰다. 그 결과 ECB 자산이 2014년 2조2000억유로(2855조원)에서 현재 두 배 이상 늘었다.

유로화 대비 달러화 환율은 2014년 1.35달러에서 2016년 1.04달러까지 낮아졌다. 지금은 1.16달러 수준을 회복한 상태다. 결과적으로 ECB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사업 투자 등 대출 비용에 민감한 지출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ECB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다음 경기 침체를 방어할 탄환이 부족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장기 채권 등 자산 가격이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의 10년 만기 채권 가격은 매우 높다. 수익률이 0.5%도 안된다. 과거와 다르게 미국 주식과 채권 가격이 떨어지면 유럽 자산 가격도 동시에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


제로 금리 상태에서 채권 매입 효과 미미

그러지 않으면 아시아와 중동에서 지정학적 이유로 유럽의 수출이 줄어들면서 전반적인 경제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 9년째 지속된 미국의 경제 확장기가 끝나고 경기가 다시 위축된다면 유럽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 현재 미국의 경제 실적이 매우 좋지만 십 년간 행한 제로 금리로 인해 자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안정성을 위협받고 있다.

다음 경기 침체의 원인이 무엇이 되든 과거 구원투수 역할을 한 ECB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또다시 활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현재 유로존의 단기금리가 이미 제로(0)에 가깝거나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금리를 조정하는 전통적인 정책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하다.

ECB가 장기 채권을 더 많이 매입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과거만큼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채권 대량 매입 등 양적 완화의 목표는 사업 투자와 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장기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 금리가 제로에 가까운 상황에서 채권 매입으로 금리를 더 낮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기 채권 수익률 인하의 또 다른 목표는 주식에 대한 수요를 늘리는 것이다. 높은 주가는 주식회사의 비용을 낮추고 가계의 부를 증가시켜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유럽에서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방법이다. 미국처럼 주식을 더 광범위하게 소유하는 국가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현재처럼 장기 채권 수익률이 이미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즉, ECB는 금리를 인하하거나 장기 채권을 매입하는 방법으로는 다가올 경기 침체에 대응할 수 없다. 그리고 금리를 인하할 능력이 없다면 ECB가 유로화 가치를 하락시켜 순 수출 규모를 늘릴 수 없을 것이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사진 : 블룸버그>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 <사진 : 블룸버그>

유로존, 세금 낮추고 정부지출 늘려야

미국은 재정 진작 조치로 새로운 경기 침체에 대응할 수 있는 반면 유럽은 더 이상 방법이 없다. 유로존은 재정 기구가 없다. 물론 각국 정부가 세금을 줄이고 지출을 늘릴 수 있다. 하지만 증가한 지출은 수입 증가로 이어지고 무역 상대국에 이득이 될 것이다. 국내 수요는 상대적으로 적게 증가해 국가 부채만 늘어나는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협력적인 재정 확대 정책을 써야 한다. 각국은 경기 침체 규모만큼 세금을 인하하고 정부 지출을 늘려야 한다. 다음 침체기까지 대응책을 미루는 것은 큰 실책이다. 모든 유로존 국가들은 너무 늦기 전에 재정 협력 정책을 주요 의제로 다뤄야 한다.


▒ 마틴 펠드스타인(Martin Feldstein)
옥스퍼드대 대학원 경제학 박사, 미국 전미경제 조사연구소 소장, 미국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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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앙은행(ECB)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금융 정책을 총괄하는 곳으로 한국은행과 같은 역할을 한다. 유로존 단일 통화인 유로화의 구매력 유지 및 물가 안정을 목적으로 하며 재정 정책, 외환 보유 및 운용, 결제 시스템의 원만한 운영이 주된 업무다.

Plus Point

ECB, 통화정책회의
양적 완화 축소 계획 발표

미국과 영국에 이어 유로존도 긴축에 시동을 걸었다. 10월 26일 유럽중앙은행(ECB)은 통화정책회의를 열고 국채 등 보유 자산을 축소하는 테이퍼링(양적 완화 축소) 계획을 발표했다.

ECB는 월 600억유로인 자산 매입 규모를 절반인 300억유로로 축소하지만 올해 말 종료 예정이던 자산 매입 기간을 내년 9월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ECB는 또 필요할 경우 자산 매입 기간을 내년 9월 이후로 연장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매입 규모 역시 상황이 악화되면 늘릴 수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ECB의 테이퍼링 계획에 대해 ‘시장 친화적’이라고 평가했다.

ECB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유로존이 경기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올 들어 유로화 가치가 12% 이상 오른 점도 강한 긴축 정책을 펼치는 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통화정책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경제 성장이 이뤄지고 있지만 물가를 상승시키기 위해 유로존은 통화를 충분히 자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