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이지애>
<일러스트 : 이지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지금처럼 산업통상자원부가 아니라 외교통상부 소속의 통상교섭본부장을 하던 2007년쯤의 일이다. 국회에 출석해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딱 잘라 말했다. “일본이 농산물 시장을 90% 이상 개방한다는 제안을 내놓지 않으면 협상을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 김 본부장은 일본을 FTA 열등생으로 여겼다. 틀린 말도 아니다. 일본의 첫 번째 FTA는 싱가포르와 맺은 것이다.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농업 개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큰 나라인데 정면 돌파할 자신이 없으니 아예 농업이 없는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우리가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중국·캐나다·중동 등과 동시다발적으로 협상을 체결하면서 ‘FTA 허브 국가’로 속도를 내는 동안, 일본은 한참 뒤떨어졌었다. 그러다 오바마 정부 출범 후 미국이 추진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참여하면서 기회를 만들었다.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12개국이 참여하는 대규모 FTA였다. 비록 미국이 빠지면서 김이 좀 새긴 했지만, 오는 3월로 협정 서명식이 예정됐다. 한·일 양국의 FTA 경쟁에서 일본의 역습인 셈이다.

얼마 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6년 만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겠다

고 나섰다. 이번 세이프가드는 세탁기와 태양광 셀·모듈을 대상으로 삼았다. 수입 세탁기는 120만 대까지는 16~20%, 초과 물량은 40~50%의 관세를 3년간 부과한다. 태양광 셀·모듈은 발전량 2.5 를 초과하는 제품에 대해 첫해 30%로 시작해 5%포인트씩 낮아지는 식으로 4년간 관세를 매긴다. 연간 250만 대, 10억달러어치를 수출해 미국 수입 세탁기 시장의 90%를 차지하는 삼성·LG전자 등 국내 업체들이 관세 폭탄을 맞게 됐다. 미국 수출 13억달러로 말레이시아(24억달러), 중국(15억달러)에 이어 3위인 한화큐셀등 국내 업체들에는 날벼락이 떨어졌다.


막전보다 막후가 중요한 통상협상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 제재를 통해 미국 기업에 유리한 교역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무역 마찰도 불사하겠다는 모습이다.

지난해 26년 만에 반덤핑 직권조사까지 재가동했을 정도다. 직권조사는 미국 기업의 피해 주장이 없더라도 덤핑 여부를 조사한다. 가장 강력한 무역 제재 무기다. 무역 역조가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서 제재한다는 ‘무역확장법 232조’까지 동원된다. 송유관·열연강판 등 철강 제품에서 페트병 등까지 조사하고 있다. 중국이 메인 타깃인데 한국도 비슷한 제품들이 주력이라 피해를 본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일본이다.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220억달러 정도다. 일본은 세 배 정도 많은 630억달러 수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일본 방문에서 “미·일 무역은 공정하지도 않고, 개방돼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폭탄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미국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피하고 있다. 북핵 대응 과정에서 당사자인 우리보다 일본이 미국과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정부는 당장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다고 한다. 김현종 본부장은 “승소 가능성이 높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승소한다고 해도 최소 2~3년이 걸린다. 그동안의 손해는 감수하겠다는 것인가. FTA 등 통상 협상은 막전(幕前)보다 막후(幕後)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일본은 제재를 피해가는데 우리 정부는 그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다. 일본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공부라도 해볼 일이다. ‘영리한 자는 지혜로운 자라면 절대로 빠지지 않을 구덩이에서 잘 빠져나오는 자’라는 말이 있다. 일본이 지혜롭다면 우리는 영리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