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지워야 하니까.” 1983년 당시 인기 영화배우이자 가수였던 전영록이 불렀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라는 노래가 있었다. 잉크로 쓰다가 틀리면 지워지지 않으니 연필로 써야 나중에 지우고 싶을 때 지울 수 있다는 내용이다. 빠른 템포에 귀에 들어오는 가사로 인기를 끌었다. 얼마 전 점심 자리에서 만난 한 관료가 이 노래 얘기를 꺼냈다. 요즘 정부 부처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이 노래 가사가 자꾸 떠오른다고 했다. “잉크보다 더한 걸로 써도 화학약품으로 지울 것 같다”는 말을 보탰다.

부처마다 박근혜 정부의 키워드인 ‘창조’라는 단어를 지우는 데 열심이다. 문재인 정부가 선호하는 ‘혁신’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국토교통부의 창조행정담당관실은 혁신행정담당관실로 이름을 바꿨다. 정부 가이드라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행정안전부가 지난해 정부조직 개편 때 이런 지침을 만들었다.

경제 부처의 종가(宗家) 격인 기획재정부는 최근 정책조정국 산하 조직의 팀명을 바꿨다. 규제프리존(free-zone)지원팀을 혁신성장지원팀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했던 ‘규제프리존’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혁신’이라고 써넣었다.

대통령 직속 지역발전위원회도 얼마 전 국무회의 의결로 ‘국가균형발전위원회’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지역발전위원회는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국가균형발전위원회로 출범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지역발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것을 9년 만에 다시 되돌린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사용하던 ‘균형’이라는 단어를 다시 집어넣었다.

2022년까지 스타트업 등 1400곳이 입주할 예정인 경기도 판교에 조성 중인 ‘판교창조경제밸리’는 작년 말 ‘판교 제2테크노밸리’로 이름을 바꿨다. 미국 실리콘밸리나 중국 중관춘(中關村) 등과 어깨를 견줄 벤처 메카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그대로지만, 3년 전 박근혜 정부에서 붙인 이름은 지웠다. 구(舊)소련에서 벌어졌던 도시 이름 바꾸기가 연상된다는 말도 나온다. 모스크바를 거쳐 흘러온 볼가강의 하류에 볼고그라드라는 도시가 있다. 1925년부터 1961년까지는 스탈린그라드(스탈린의 도시)라 불렸고, 제2차세계대전 격전지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하루아침에 이름이 바뀌었다.


방향 자꾸 바꾸면 비틀거려

이런 일이 이번 정부에서 처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2008년 4월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소유즈 로켓으로 9박 10일간 우주정거장을 다녀온 한국 1호 우주인 이소연씨는 우주정거장 안에서 비행복에 붙어 있는 ‘과학기술부’라는 패치를 뜯어내고 ‘교육과학기술부’라는 새 패치로 바꿔 달아야 했다. 다른 나라 우주인들이 “왜 (시간 낭비인)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더라고 했다. 우주정거장에 의류 등 화물을 미리 쏘아 올려놓았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부처 이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씨가 10년 만에 입을 열면서 알려졌다.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부처 이름이나 사업 명칭 변경이 대수롭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름이 달라지면 내용도 바뀐다. 어제까지 칭찬받던 일이 오늘은 욕먹을 일이 된다. ‘적폐(積弊)’로 몰리기도 한다. 관가(官街)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모양이다. 이름 지우기·바꾸기 서슬에 놀란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하게 된다. 이번에 바꾼 간판이 5년 뒤에도 그대로라는 보장이 없다는 생각에 눈치보기가 점점 심해진다.

이런 상황은 경제 전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기업들이 투자나 사업 계획을 세우는 데 변수가 된다. 정부가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면 시장은 혼란에 빠진다. 무슨 일이든 방향과 속도가 중요하다. 물론 방향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방향을 자꾸 바꾸면 비틀거리게 된다.

이진석 조선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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