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IMF 자문위원,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코노미스트, 미국 백악관경제자문위원회 자문위원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IMF 자문위원,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코노미스트, 미국 백악관경제자문위원회 자문위원

암호화폐공개(ICO)는 현재 1600종에 이르는 암호화폐를 통해 벤처기업이 자금을 조달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ICO에 나서는 사업자는 ‘토큰’이나 ‘코인’을 발행해서 달러화나 파운드화, 유로화 같은 실제 사용되는 통화를 확보할 수 있다. 이 토큰과 코인이 향후 실물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사용될지는 물론 불투명한 상황이다.

ICO 자문회사인 ‘사티스그룹(Satis Group)’은 전체 ICO의 81%가 사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ICO에 나서는 벤처기업인 10명 중 8명이 사실은 투자자의 돈을 가지고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는 사기꾼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암호화폐의 8%만이 거래소에서 거래되고 나머지 92%는 실패할 것이라는 관측도 결국에는 들어맞을 가능성이 크다. ICO는 미국 증권시장에서 투자자가 사기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여러 법망을 피하기 위한 꼼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암호화폐가 아닌 전통적인 금융 산업에 투자하는 이들은 다양한 법적 권리를 부여받는다. 주주라면 배당금, 채권자라면 이자를 받을 수 있다. 기업이 채무불이행이나 파산 상태에 빠져도 주주들은 일정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유가증권이나 주식발행인이 주(州)정부에 등록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이런 권리들은 법적인 강제력이 있다.

주식을 발행하는 기업은 정확한 재무정보와 사업계획, 잠재적인 리스크에 대한 사항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합법적인 투자 거래라면 말이다. 자격 요건을 충족한 투자자들에게만 고위험 증권을 발행할 수 있게 하는 정부 규제도 있다. 조세 회피나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을 은폐할 경우, 또는 테러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처럼 범죄 행위를 막기 위한 자금세탁 방지 제도도 있다.

무법천지인 ICO 시장에서 대부분의 암호화폐는 이런 법률과 규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행된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ICO는 투자자들에게 정당한 법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 대신 베일에 싸인 ‘백서(white paper)’가 투자자가 확인할 수 있는 전부다. 백서의 발행인은 익명이고 추적 또한 불가능하다. ICO는 온갖 규제를 무시하고 잠재적인 범죄자들에게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최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제이 클래이튼(Jay Clayton) 회장은 모든 암호화폐를 규제 대상인 ‘유가증권’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미 정부의 규제망에 들어와 있는 암호화폐 시장의 선두주자 ‘비트코인’뿐 아니라 다른 암호화폐도 규제 대상에 포함시키겠다는 의미다.

바꿔 이야기하면 암호화폐 시가총액 2위와 3위인 이더리움과 리플은 그동안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에서 블록체인(암호화폐 기술)을 가르치는 개리 겐슬러(Gary Gensler) 전(前)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장도 클래이튼 회장과 같은 입장을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 몇 년간 수십억달러를 모은 수백 종의 ICO는 엄밀히 따져서 모두 불법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ICO의 비즈니스 모델이 그저 소비자를 약탈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이자벨라 카민스카(Izabella Kaminska)와 증거기반관리센터(CEBM)의 마틴 워커(Martin Walker)가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UK House of Commons Treasury Committee)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런 약탈적인 구조를 설명했다.

일반적인 거래에서 소비자는 달러·파운드화 같은 통화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한다. 하지만 ICO를 통해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선 기존 통화를 토큰으로 바꿔야 한다. 보통 합법적인 비즈니스 모델에서는 소비자들을 이렇게 고생시키지 않는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비즈니스 모델이라면 더욱 그렇다.

ICO 비즈니스 모델에서 기존 통화를 토큰으로 바꾸게 하는 유일한 이유는 토큰 가격을 높이거나 더 많은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치과 치료에만 사용되는 괴상한 암호화폐인 덴타코인을 생각해 보자. 실제 대부분의 치과 의사들은 덴타코인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암호화폐에 기반한 불법 카르텔은 “토큰 가격이 오르면 결국 토큰을 구매한 소비자가 이득을 볼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어불성설이다. 토큰 가격이 재화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시장 가격보다 높아진다면 누가 토큰을 구매하겠는가.


화폐 기능 파괴하는 암호화폐

암호화폐 토큰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단일 화폐가 가지는 가격 예시 기능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암호화폐의 유토피아에서는 토큰마다 재화와 서비스 가격이 제각각이다. 소비자들은 어떤 서비스를 이용하고 싶을 때 과연 어떤 토큰을 이용해야 좋을지 가격을 비교할 자신이 없어진다. 사실 토큰으로 무언가를 살 수 있는지도 의문이기는 하다. 어쨌거나 재화나 서비스를 구매하기 위해 국가에서 정해놓은 단 하나의 화폐를 사용하는 대신 200여 종의 토큰을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국가에서는 재화나 서비스 가격이 늘 크게 요동칠 것이고 혼란은 만연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걸 사기 위해 매번 하나의 토큰을 다른 토큰으로 바꾸는 비용을 감수해야만 한다.

경제위기에 몰린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재정 확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암호화폐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진 볼룸버그
경제위기에 몰린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재정 확보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암호화폐를 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진 볼룸버그

특정 국가나 지역 내 모든 사람이 같은 화폐를 쓰기 때문에 화폐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 화폐는 전통 사회가 의존하던 부정확하고 비효율적인 물물교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재화의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공재다.

ICO를 하는 사기꾼들은 우리를 ‘우주 가족 젯슨(The Jetsons)’이 사는 미래 세계가 아니라 ‘고인돌 가족(The Flinstones)’이 사는 석기시대로 안내할 것이다. 단일 화폐를 통한 거래를 포기하고 온갖 종류의 토큰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한다는 건 물물교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ICO 사기꾼들의 유토피아적 수사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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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

ICO(암호화폐공개·initial coin offering)는 사업자가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 코인을 발행하고 이를 투자자에게 판매해 자금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코인이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되면 투자자는 이를 사고 팔아 수익을 낼 수 있다.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모으는 기업공개(IPO)와 기본적인 원리는 비슷하지만, ICO는 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이 없고 금융당국의 규제에서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ICO를 신생 기업이 진행하다보니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아 투자 리스크가 큰 상품으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