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일상에서 체감경기를 어림잡아 볼 방법이 많다. 서울 중심가에 빈 택시가 몇 대나 줄지어 서 있는지, 유명한 곰탕집에서 하루에 몇 그릇이나 팔렸는지, 점심시간 회사 구내식당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얼마나 길어졌는지 등이다. 이런 숫자들로 경기 오르내리는 걸 너끈히 짐작할 수 있다.

12년쯤 전에 이런 체감경기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일보와 LG경제연구원이 ‘길거리 경기 조사’라는 지표를 만든 적이 있다. 식당, 수퍼마켓, 편의점, PC방 등 자영업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경기를 조사했다.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 등 5대 도시의 80개 업종 사장(자영업자)과 직원 300명을 고정 패널(응답자) 삼아 3개월마다 실시했다. 정부 통계 지표로는 알기 어려운 밑바닥 경기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패널의 가게 주변 상가나 골목 경기를 물어보는 주관식 문항도 있어, 300명의 관찰자를 통해 전국의 상가 골목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조사된 체감경기가 거의 항상 통계청 경기 조사보다 나빴던 것으로 기억한다. 체감경기는 그야말로 피부로 느끼는 경기다. 통계청에서 내놓는 각종 통계나 수치보다 빠르고 정확할 때가 많다. 일자리가 줄고, 벌이가 이전보다 못하면 경기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국민은 다 안다. 경제 관료가 청와대 눈치 보면서 “아직 경기 후퇴는 아니다”라고 해도 허리띠 졸라맬 준비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 등 경기 부양책이 효과를 내면서 성장률이 치솟고 있는 미국의 체감경기가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외신이 전한다. 미국의 비영리 민간 경제조사 업체인 ‘콘퍼런스보드’가 발표한 8월 소비자신뢰지수가 133.4로 나타났다. 7월보다 5.5포인트 올랐고, 17년 10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다. 기준치(100)를 넘으면 앞으로 경기가 좋을 것이라고 보는 소비자가 나빠질 것으로 보는 소비자보다 많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물건 사라’고 세계를 윽박지르는 세일즈맨이라, 분기 성장률이 연율 환산 기준으로 4%를 넘어설 정도로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찬바람 도는 체감경기

반면 우리나라 체감경기는 찬바람이 돈다. 한국은행에서 나오는 통계와 조사 중에 체감경기와 가장 가깝다는 소비자심리지수가 1년 5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8월 소비자심리지수는 99.2로 기준치(100)를 밑돌았다. 이런 일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가 있었던 작년 3월(96.3) 이후 처음이다. 6개월 후 전망을 보여주는 향후경기전망(82)도 전달보다 5포인트 떨어졌고, 취업기회전망(85)도 2포인트 떨어져 1년 5개월 만에 가장 낮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9월 1일 고위 당·정·청 전원회의에서 “우리나라 경제지표와 체감경기 간 온도차가 매우 크다”고 했다. 김 부총리는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성장률, 수출 등의 지표는 나쁘지 않은데, 일자리나 소득 분배 등 체감경기가 매우 나쁘다”고 했다. 그가 이날 발표한 ‘향후경제운영방향’에 ‘한국 경제의 체감 온도 높이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김 부총리 말대로 수출은 지난달까지 79개월 연속 무역수지 흑자 행진을 이어 가고 있다. 올 들어 8월까지 누적 수출액이 3998억달러로 사상 최대다. 성장률이 3% 안팎을 유지하는 것도 수출이 이렇게 버텨주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성장률 3.1% 가운데 3분의 2 정도가 수출 덕이었다. 반도체 수출이 올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에 달할 정도로 편중이 심하긴 하지만, 우리 기업은 총성 없는 전쟁터인 수출 전선에서 제 몫을 하고 있다.

수출이 이렇게 호조를 보이는데도 체감경기가 악화되는 것은 소득 주도 성장 실험 역효과로 고용 부진, 소득 정체가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시장에서 신뢰를 잃고, 실패 판정을 받은 정책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머지않아 체감경기도 ‘사상 최악’ 대열에 합류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