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최근 유럽에서는 유럽군(軍) 창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이 논의를 주도하는 인물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다. 그는 11월 6일 “진정한 유럽 군대가 필요하다”고 말한 데 이어 18일 독일 베를린 하원 연설에서 “유럽은 더 강해지고 더 자주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군 창설 논의는 과거에도 있었다. 1950년대에 유럽방위공동체(EDC) 결성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무산됐지만, 미국의 영향력이 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유럽군 논의가 다시 나온 이유로 △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결정 △ 트럼프의 나토 흔들기에 따른 동맹 파기 가능성 △ 유럽연합(EU) 공동의 명분을 찾기 위한 프랑스와 독일의 필사적 노력 등 세 가지를 꼽았다. 이런 가운데 유럽의 저명한 경제학자 한스-베르너 진 교수는 이번 기회에 유럽이 완전한 정치적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스-베르너 진(Hans-Werner Sinn) 뮌헨대 경제학과 교수, Ifo 연구소 소장, ‘독일 경제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저자
한스-베르너 진(Hans-Werner Sinn)
뮌헨대 경제학과 교수, Ifo 연구소 소장, ‘독일 경제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저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과 관계에서 용납할 수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NATO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금을 물고 늘어지는 것뿐 아니다. 2015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미·러·중·영·프)에 독일을 더한 ‘P5+1’ 국가가 이란과 맺은 핵협정도 독단적으로 파기했다.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일방적으로 이란과 삼자 간 모든 교역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여기엔 이란과 핵협정에 서명한 국가도 해당한다. 이에 따라 이란에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외국 기업은 현재 미국 정부의 제재 위협에 직면해 있다. 관련 거래를 처리하는 은행권도 미국 금융 시스템에 대한 접근이 막힐 위험에 처해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독일과 러시아가 체결한 ① ‘노르트스트림(Nord Stream)2’ 가스관 사업을 겨냥하고 있다. 이란 핵협정 파기와 유사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현재 미국 의회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 가스관 사업에 참여하는 유럽 기업에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는 ② 법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업 간 계약이 이행될 의무가 있음에도 말이다. 현재 이 사업을 총괄하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에 따르면, 이 사업에 대한 주독일 미국 대사의 태도는 외교관보다는 ‘점령국 대사(Besatzungsoffizier)’에 가깝다고 한다.

모두 트럼프 행정부의 파괴적인 행동이 프랑스와 독일 정부를 분노에 빠뜨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노 너머를 보면 긍정적인 면도 있다. 국가 주권에 대한 트럼프 공격은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유럽이 내부적으로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는 점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유로화 도입으로 남부의 유로화 사용국 물가가 빠르게 상승했고, 그 영향으로 이들의 역내 경쟁력이 심각하게 저하됐다. 이런 경제적 문제가 불거지자 유럽 대륙에 유로화 회의론자(Euroskeptic)와 민족주의 진영이 부상했다. 또 최근엔 영국의 EU 탈퇴 결정으로 ‘하나의 유럽’ 프로젝트가 흔들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행동은 ‘신이 내린 기회’다. 유럽인이 자주권을 지키고 번영하기 위해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EU는 (브렉시트 이후에도) 4억5000만 명에 달하는 EU 인구의 ③ 3분의 2에 불과한 미국이 우리를 속국 취급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④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1월 초 유럽군 창설의 필요성을 공식 선언했다. 이에 대해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독일 국방부 장관은 “(유럽에) 방위비 분담금을 더 요구하는 트럼프에 대한 대답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물론 폰 데어 라이엔 장관은 트럼프의 최종 목표가 독립적인 유럽군 창설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독일이 힘을 보태 창설될 유럽군은 NATO를 보완하고 강화할 것이란 믿음을 줄 것이다.


지난 18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베를린에서 만나 유럽연합 안보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메르켈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의 유럽군 창설 주장에 힘을 보탰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EU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의 마크롱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 사진 블룸버그
지난 18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베를린에서 만나 유럽연합 안보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메르켈 총리는 마크롱 대통령의 유럽군 창설 주장에 힘을 보탰다. 사진은 지난해 12월 EU 정상회담 기자회견장의 마크롱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 사진 블룸버그

앞으로도 환태평양동맹은 중요할 것이다. 유럽군이 창설된다고 하더라도 유럽 시민은 과거와 똑같이 미국을 우방으로 인식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 간의 깊은 역사적 관계는 변함없을 것이다. 모두 트럼프 이후에도 미국의 역사가 계속되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더 좋은 점은 유럽이 활기차면서도 집단적인 목표 의식을 갖고 다시 한번 정치적 통합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동안 유럽 프로젝트는 정치적 통합은 뒷전이고 경제적 통합만 추구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1952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과 독일은 EDC라는 개념으로 일종의 유럽군 결성에 합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의회가 비준을 거부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유럽이 정치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는 ⑤ ‘마스트리흐트조약’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프랑스가 방해했다. 프랑스가 유로화 도입에 찬성했던 이유는 자국을 포함한 지중해 인근 회원국이 독일처럼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때 정치적 통합에 강하게 저항했다. 여기엔 EU 중앙정부가 연합군을 만들고 이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갖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프랑스가 과거 아프리카 식민지에 했던 것처럼 자국 군사력이 현지에 개입하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프랑스가 EU 중앙정부의 명령을 받는 연합군과 자국군의 합병을 고려하는, 다시 말해 유럽군 창설을 심각하게 고민 중인 게 맞다면 마크롱 대통령은 후세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될 것이다.

물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래도 정말 이 일이 현실화한다면 마크롱은 트럼프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Tip

러시아 서부 나르바만(灣)에서 발트해(海) 해저를 지나 독일 북부 그라이프스발트까지 1225㎞에 이르는 가스관 사업이다. 내년 여름 완공 목표. 노르트스트림2가 완공되면 러시아에서 독일로 직송(直送)하는 천연가스가 두 배로 늘어난다. 독일은 가스관 건설로 에너지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데 더해 경제적인 이득도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산(産) 천연가스를 싼값에 대량으로 사들인 뒤 쓰고 남는 분량을 유럽 다른 나라에 되팔아 수익을 내려는 것이다. 독일은 군사적으로는 러시아에 적대적이지만, 경제적 이익을 위해 손을 잡는 셈이다. 이에 대해 트럼프는 “독일이 러시아의 포로가 됐다”며 비난하고 있다. 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 매체 롤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유럽의 저항을 피하면서 러시아를 제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밥 코커 상원 외교위원장(공화당)도 지난 9월 청문회에서 “유럽 친구를 빼고 러시아만 벌할 방법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최근 미국은 ‘셰일가스’를 무기로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러시아를 꺾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은 10월 의회 전문 매체 더힐 TV에 출연해 “(넘쳐나는) 가스를 미 동북부와 유럽으로 보내 천연가스와 LNG 시장에서 러시아가 갖고 있는 헤게모니에 도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인구 3억2570만 명을 의미한다.

최근 유럽의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른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이 트럼프의 심기를 건드렸다. 11월 11일 제1차세계대전 종전 기념식에서 그는 트럼프를 앞에 두고도 미국을 겨냥해 “민족주의는 애국의 정반대이며, 이것은 배신”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에 대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분담금을 더) 지불하든지”라고 압박했다.

1992년 당시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유로화 도입과 EU 설립 합의를 담은 마스트리흐트조약의 조인을 이끌어내 EU 출범의 기틀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