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한 시중은행의 경기도 어느 지점에 ‘농땡이’라는 별명이 붙은 40대 선임 차장이 있다고 했다. 3년간 대출·예금·펀드 등 상품을 판매한 실적이 단 한 건도 없고, 지각이 다반사에 근무 중 온라인 바둑을 둘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도 1억원 넘는 연봉을 받아간단다. 몇 해 전 들은 얘기다. 은행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칭 ‘승포자(승진포기자)’라고 한다. 승진 포기하니 실적 올릴 이유가 없고, 지점장 눈치볼 일도 없다. 그저 출근만 하고 월급만 챙기면 된다. 시중은행 인사 담당자들은 ‘놀고 먹는 직원들이 10명 중 1~2명꼴’이라고 한다. 이러고도 은행이 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기한 일이다. 우리나라 은행원 3명 중 1명은 억대 연봉자다. ‘개미’보다 ‘베짱이’가 더 살기 좋은 곳이 은행이다.

새해 벽두부터 평균 연봉 9100만원인 KB국민은행 노조가 총파업을 했다. 이번 파업은 무려 19년 만이라고 한다. 은행 파업은 고객 불편이 크다는 생각에 경영진도 파업만은 막으려고 했고, 은행원들도 총파업은 자제했다. 그래서 은행 파업은 드물었다. 이번에도 KB국민은행 경영진들은 파업을 막으려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행장 이하 경영진 54명이 일괄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노조가 눈도 깜빡이지 않아 효과를 보진 못했다.

노조 요구를 추려보면 이렇다. 기본급의 300% 성과급 지급, 일반 직원은 2.6%,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 등은 5.2% 임금 인상, 임금피크제 진입 시기 연장, 점심시간을 30분에서 1시간으로 연장하고 아예 PC 전원을 차단하자는 것 등이다. 이외에도 많은데, 핵심 쟁점은 승진 못 하면 임금 인상 상한선을 두도록 하는 페이밴드(payband) 전면 도입을 백지화하라는 것이라고 한다.

승진 못 해도 해가 바뀌면 꼬박꼬박 연봉이 오르니 입사 20년 차 만년 대리가 천신만고 끝에 실적 쌓아 승진한 15년 차 과장보다 연봉이 2000만원 더 많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노조는 ‘실적 압박에 내몰리게 될 수 있다’고 가로막고 나섰다. 이걸 막겠다고 19년 만에 파업까지 벌였다.

그런데 ‘제 발등 찍었다’는 말이 나온다. 예상됐던 혼란, 고객 불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1만7000명 직원의 30%가 넘는 5500명이 파업을 하면 큰일이 날 줄 알았는데 별일 아니었다. 일부 고객들은 불편을 겪었지만, 대부분은 문제가 없었다. 온라인·모바일 뱅킹 시대라서다. 주변에는 “은행 지점은 1년에 서너 번도 안 가는 것 같다”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없이 굴러갈 줄 알아”라고 공포 분위기 조성했는데 “어라, 잘 굴러가네”라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당장 은행원 30%가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파업의 효과가 3000만 명에 달하는 KB국민은행 고객 기분만 상하게 하고, 브랜드 충성도 낮춘 것밖에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되는 세상이다. AI와 로봇에게 뺏길 일자리 가운데 제일 앞줄로 꼽히는 직종 중 하나가 은행원이다. 세계 최대 은행이었던 미국 시티그룹의 비크람 팬티드 전 최고경영자(CEO)는 1년 반 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5년 내로 은행 일자리의 30%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가 무인(無人) 주문기에 내쫓기고 있지만, 은행원도 머지않아 그런 시절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은행 지점은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다. 한국 은행들은 영업 활동에 들어가는 판매관리비 중 인건비 비중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국 상업은행의 경우 40% 선인데 우리는 60%를 넘는다. 이런 고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 지점 문을 닫고, 무인기기·점포를 늘리는 중이다. AI를 활용한 대출 상담 등이 예상보다 빨리 도입되고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억대 연봉 받으면서 파업으로 실적주의 도입을 막겠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가능하겠나. 은행원은 ‘화이트칼라’의 상징이었다. 제발 좀 멋진 모습 보여달라고 부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