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역시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

할리우드에도 진출한 일본 유명배우 와타나베 켄(渡辺謙)이 자신 있는 표정으로 들어 보이는 것은 고령자를 위한 돋보기안경이다.

지난해 일본에서 가장 화제가 된 TV 광고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접대부가 실수로 주저앉아 엉덩이로 짓눌러도 안경은 무사하다. 거물 배우가 과장된 톤으로 “신뢰의 일제!”라고 외친다. 제품의 매력을 드러내는 미려한 연출보다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스토리 전개가 관심을 모았다.

이 안경은 하즈키 컴퍼니라는 곳에서 만든다. 대형 완구 업체 다카라의 자회사였다가 2007년 일본 사모펀드인 프리베 기업 재생 그룹에 인수됐다. 2017년부터 100억엔에 달하는 TV 광고비를 쏟아부어 주력 상품인 돋보기안경의 인지도를 높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전 일본 총리의 장남인 탤런트 고이즈미 고타로(孝太郎), 인기 여배우 다케이 에미(武井咲) 등이 광고에 등장했다.

1만엔(약 10만원) 남짓한 가격의 이 돋보기안경은 일본에서 절찬리에 판매 중이다. ‘일본제’를 강조하며 고령화로 늘어난 내수 시장 수요를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일본인에게 ‘국산’은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즈키는 “‘중국산 유사품에 주의하라’며 ‘메이드 인 재팬’ 표기가 없으면 조악한 위조품”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즈키 돋보기안경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소니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 ‘워크맨’과 그랜드세이코 손목시계, 조지루시(象印·코끼리표) 압력밥솥이 동경의 대상이던 1980·90년대를 돌이켜보면 말이다. 전자기타 연주자들에게 일제 음향장비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품질을 약속했다. 미국 음향기기 업체 보스(Boss)의 디스토션(전자기타 음을 기계적으로 왜곡해 출력하는 장비) ‘DS-1’의 초기 물량은 일본에서, 이후로는 대만에서 생산했는데, 일제는 대만제의 두 배가 넘는 웃돈을 줘야 구할 수 있었다.

반면 최근 일본 미디어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제’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어떤가. 시코쿠 지방의 명물인 이마바리(今治) 수건, 파이로트의 지워지는 볼펜 ‘프릭션’ 같은 소소한 물건들이다. 분명 훌륭한 제품이지만, 최첨단의 끝을 달리던 과거의 일본산 제품에 비하면 격이 다르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좋아봐야 얼마나 다를까 싶은 돋보기안경을 가지고 ‘메이드 인 재팬’이라며 호들갑 떠는 모습은 헛웃음을 짓게 한다.

최근 수년간은 ‘메이드 인 재팬’의 몰락이 이어진 시기였다. 2016년 대만 홍하이에 인수된 샤프는 과거 액정화면으로 알아주는 회사였다. 샤프가 미에현 가메야마 공장에서 만들던 TV는 ‘세계의 가메야마 모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샤프는 한국과 중국 가전 업체의 품질 상향과 가격 경쟁력에 맥없이 점유율을 내줬고, 가메야마 공장은 애플 부품을 만드는 하청 공장으로 전락했다.


일본 배우 와타나베 켄이 출연한 하즈키 컴퍼니의 돋보기 안경 광고. 사진 유튜브 캡처
일본 배우 와타나베 켄이 출연한 하즈키 컴퍼니의 돋보기 안경 광고. 사진 유튜브 캡처

명품 노트북 ‘바이오’를 만들던 소니의 노트북사업부도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와 애플의 프리미엄 제품 사이에 눌려 사라진 지 오래다. 최근 ‘명품 가전’으로 주목받던 중소가전 업체 발뮤다는 토스터의 품질 결함으로 리콜을 통한 무상 교환을 발표했다.

이 밖에도 미쓰비시와 스즈키 자동차의 연비 조작, 다카다 에어백의 대규모 리콜, 도시바의 분식회계와 닛산자동차의 무자격자 품질 검사, 고베제강과 도요고무공업, 도레이의 품질 데이터 날조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조업의 신뢰를 뿌리째 뒤흔드는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과거의 일본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사건들이다.

글로벌 제조 업체들과 경쟁하게 된 일본 업체들은 과거의 ‘모노즈쿠리(일본 사회의 장인정신)’보다는 이익 극대화로 눈을 돌렸다. 인구 감소로 높아지는 인건비에 기업들은 품질 관리보다 비용 절감을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부터 ‘과잉 품질’의 피로감이 누적돼 온 일본의 제조 현장에 비용 절감은 좋은 구실이었다. 나가타 히로시 도쿄공대 교수는 “비용 절감 추세가 제조 업체들의 윤리관을 흔들어 신뢰도가 낮아지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엔화 약세를 유도해 제조 업체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던 ‘아베노믹스’는 사실상 실패로 귀결되는 움직임이다. 지난달 일본 후생노동성의 근로통계 조작이 발각되며 그동안 발표해 온 성과가 부풀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전년 대비 임금 상승률은 작년 6월의 경우 21년 만의 최고치인 3.3%에 달했는데, 알고 보니 임금이 높은 기업들을 인위적으로 포함시킨 것으로 실제 상승률은 1.4%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기관마저 데이터를 속이는 판이니 기업들은 거리낄 것이 없어진 것 아닐까. 결과는 안타깝게도 일본 제조업의 신뢰 추락이라는 인과응보로 이어지고 있다.

반면 살아남은 일본 기업의 철학은 확실하다. 적극적인 구조조정과 첨단기술 도입으로 완전히 부활한 도요타, 비핵심 사업은 물론이거니와 캐시카우(cash cow)였던 반도체장비 부문마저 매각하며 인프라·사물인터넷(IoT) 기업으로 재탄생한 히타치 같은 기업은 ‘메이드 인 재팬’의 허상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변해 가는 세상 속, TV만 틀면 나오는 일제 돋보기안경 광고는 못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이진석 ‘오타쿠 진화론’ 저자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