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훈 한국 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장지훈
한국 외국어대 졸업,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작년 우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중국 제조 2025(중국이 2025년까지 반도체‧로봇‧항공기 등 첨단 산업에서 세계 패권을 잡겠다는 목표로 추진하는 정책)’와 중국의 ‘반도체 굴기(반도체 시장 자급률을 2025년까지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성장 정책)’를 떠올려본다. 당장이라도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를 삼킬 것처럼 묘사하던 그 이야기들. 그로부터 고작 몇 달이 지나지 않은 2019년 봄, 중국 정부가 트럼프에게 가로막힌 반도체 산업 대신 방향을 돌려 디스플레이 시장을 성장시키려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증권가를 통해 나오기 시작하자, 신문사 IT 지면을 가득 채우던 반도체 굴기에 대한 이야기는 봄을 앞두고 눈 녹듯 사라졌다.

폴더블(접을 수 있는) 스마트폰 출시, 4G에서 5G로의 세대 전환 그리고 서버용 시장에서는 기다리던 인텔의 차세대 서버용 프로세서 ‘케스케이드 레이크’ 출시를 앞두고 있어 반도체에 대한 투자 심리가 안정을 찾아가는 오늘, 작년의 그 호들갑스럽던 이야기와 함께 지난 반도체 업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1980년대 초, 모두가 아는 것처럼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는 단연 미국이었다. 인텔, 마이크론,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이 이름의 영향력이 그때는 더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반도체 시장의 질서에 변화가 찾아왔다. 반도체 강국 미국의 아성을 무너뜨린 이들은 바로 일본 기업이었다. NEC, 히타치, 도시바,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은 엔저(엔화 가치가 떨어져 엔‧달러 환율이 올라가는 현상) 기조 속에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반도체 시장을 효과적으로 공략해 나갔고, 이와 같은 일본 기업의 저가 물량 공세에 미국 기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미국 정부가 나섰다. 1985년에 있었던 플라자합의(G5의 재무장관들이 외환 시장에 개입해 달러화 강세를 시정하도록 결의한 조치) 1년 뒤인 1986년에 맺은 1차 미‧일 반도체 협정은 반도체와 일본이라는 명확한 두 대상을 향한 직접적이며 실효적인 조치였다.

협정에서는 ‘향후 5년 내 일본 시장에서 외국산 반도체 제품 점유율은 20%를 차지해야 한다’는 식의 아주 구체적인 내용이 다뤄졌고 일본이 조약에 서명한 후에도 미국은 계속해 반도체 수입을 늘리라는 압박을 이어 나갔다. 실제로 조약이 체결된 1년 후,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해당 조약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판단해 일본에 경제 보복을 했다. 일본에는 3억달러(약 3378억원)의 손해 배상금이 청구됐으며 컴퓨터, 전동 공구, TV 등에 100% 관세가 부과됐다.

미국 정부의 견제에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주춤하면서 반도체 일본의 아성이 조금씩 무너져갔다. 1990년대 중반, 반도체 호황 뒤에 일본 기업들이 설비를 늘려 공급 과잉이 빚어졌고, 혹독한 가격 경쟁(호황 뒤에 공급 과잉이 찾아오는 오늘날의 반도체 시장의 모습과 흡사한)에 1999년 후지쓰, 2001년에는 도시바가 D램 사업에서 철수했다. 이어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일본의 마지막 D램 기업이었던 엘피다마저 파산신청에 들어가면서 반도체 업계에서 30년간 이어온 패권이 미국에서 일본, 다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왔다.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 끊임없이 회자돼 왔던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먼저 반도체 산업의 위기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작년 말 D램과 낸드플래시 가격이 하락하며 시장이 완연한 침체기로 접어들자 이 내용을 중국의 반도체 굴기와 묶어, 당장 올해부터 반도체 업계가 극심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논조의 공포론이 확산됐다. 중국 반도체 굴기 대표 주자인 이노트론(중국의 D램 업체)이 조만간 EUV(반도체에 회로를 새기는 노광 공정에 사용되는 장비로 EUV를 이용한 공정을 완성한 업체는 전 세계에 삼성전자와 TSMC 단 두 곳에 불과함) 공정을 완성할 수도 있다거나, 아직 32단 낸드플래시(플래시 메모리의 기술력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로 많은 층수를 쌓을 수 있는 업체일수록 경쟁력이 크다) 양산에 머물러 있는 YMTC(창장 메모리)를 아직 삼성이나 하이닉스도 도달하지 못한 128단 낸드플래시 양산에 가까이에 와 있는 기업처럼 설명하고, 결국 이들이 더 많은 물량을 밀어 넣어 반도체 시장을 극심한 치킨게임으로 몰아갈 것처럼 묘사했다.

물론 이 이야기가 그 정도의 설득력을 갖게 된 배경에 공급 과잉으로 인한 가격 하락이라는 실제 위기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중국발 반도체 위기론이 대두되는 과정에서 국내 반도체 업계는 더욱 큰 피해를 떠안았다.

그러나 적어도 최근 국내 반도체 업계, 특히 최근 D램과 낸드플래시 영역에서 겪고 있는 공급 과잉의 위기는 1980‧90년대 그리고 2000년대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호황 뒤에 불황이 찾아오는 그 전형적인 메커니즘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반도체 가격 하락이라는 당면한 현상에 대한 원인으로 중국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면서, 그 영향을 과장해 평가한 의견 때문에 주식시장이 더욱 심하게 요동쳤던 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 이 협정에서 미국은 일본에 국내에서 소비되는 반도체의 20%를 해외산 반도체 수입으로 할당하라고 요구했다. 사진 게티이미지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 이 협정에서 미국은 일본에 국내에서 소비되는 반도체의 20%를 해외산 반도체 수입으로 할당하라고 요구했다. 사진 게티이미지

시장 왜곡하는 주장 지양해야

이렇게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단순히 주식시장에 대한 악영향을 넘어서는 더 근원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이번 반도체 위기론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반도체 위기론이 다소 지나친 전망이었다는 것이 명확해진 이후에도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잘못된 결론이 파생되고 있다. 오늘날 반도체 대한민국의 위치는 모두 미국이 만들어준 것이고 이번의 위기 역시 미국이 해결해줬다는 다소 허무한 주장이 그 한 가지인데, 물론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주도권이 넘어오게 되는 과정에 미국의 역할이 컸고,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가 그 역학관계 속에서 성장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반도체 코리아는 ‘대한민국에서 반도체는 무리’라는 자조 섞인 편견 속에서도 반도체 산업에 청춘을 바친 현업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그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우리의 힘으로 이뤄낸 부분에 대해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 지금은 그때와 많은 것들이 다르다. 혼란기에 살아남은 우리 업체들은 이제 시장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갖췄고, 시장의 공급과잉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의 규모도 확보했다. 미국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식의 프레임을 우리 스스로에게 씌우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틀렸음을 알려야한다.

2019년, 시장에는 다시 반도체 낙관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반도체 위기가 끝났다거나 혹은 조만간 곧 끝날 것이라는 의견을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반도체 코리아의 시대는 이제서야 겨우 시작됐다. 간혹 2010년대 이후부터 우리나라가 반도체 영역을 휩쓴 것처럼 생각하는 의견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반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삼성전자 역시 반도체 1위 자리에 오른 것은 아직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2017년부터다. 업계는 계속해 과거의 시간들을 기억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맞서 더 단단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다져 나가야 한다.  

위기가 끝나자 다시 안도감이 고개를 들려는 2019년 봄,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안도감을 경계해야 한다. 이 작은 안도감마저 사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미국이 가지고 있던, 혹은 일본이 누렸던 그것보다 아직은 너무도 작고 초라한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