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물꼬를 트기 시작한 1998년까지 한국에서 일본 대중문화를 즐기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 가요나 애니메이션을 구하려면 서울 용산전자상가나 청계천을 돌아다니며 불법 복제된 ‘백판’을 사야 했다. 보따리상이 밀반입한 정품 콤팩트디스크(CD)는 가격이 1장에 4만~5만원이나 됐다.

도쿄의 유학생들은 PC통신을 통해 ‘동경유학생센터(동센)’라는 이름으로 음반이나 비디오를 판매했다. 최근 유행하는 ‘해외 구매대행’의 시초였다.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설립자 김유식 사장이 ‘동센’을 운영했다.

당시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해 있던 필자는 ‘왜색 문화에 빠졌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경제적 부담 사이에 짓눌려 있었다. 그런데도 관심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건, 버블경제 시절 막강한 자본력의 산물이었던 일본 대중문화 콘텐츠 자체의 질적 매력과 함께 금지된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끌림이었다.

20년이 지난 2019년, 일본 사회의 화두는 단연 한류의 재래(再來)다. 지금 불고 있는 제3차 한류 열풍을 즐기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당시 필자가 느꼈던 불편한 감정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악화돼 가는 한·일 관계 탓에 한류를 즐기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로부터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고 있다. 지난해 말 일본의 레이더 조사(照射·겨냥해서 비춤) 주장(한국 구축함이 일본 자위대 소속 초계기를 사격 통제 레이더로 조준했다는 주장)과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발언이 이어지며 일본 사회는 자국의 한류 팬에게 ‘이래도 한국이 좋으냐’는 듯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지금 일본에서 한류 콘텐츠를 구하는 건, 20년 전 밀수품을 구하러 다니던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쉽다. 도쿄 시부야의 타워레코드는 최근 한류가 주 수입원이다. 지상 9층, 지하 1층의 타워레코드 시부야점은 지난 1월 대규모 리뉴얼을 해 5층 한 층을 통째로 K-팝(K-POP)으로 채웠다. 타워레코드는 “세계 최고의 K-팝 스토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방침을 밝혔다. TV와 인터넷, 잡지와 거리 광고판엔 K-팝의 물결이 끊이지 않는다.


2018년 12월 12일 일본 사이타마 수퍼아레나에서 열린 ‘2018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이 4관왕에 오른 후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2018년 12월 12일 일본 사이타마 수퍼아레나에서 열린 ‘2018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에서 방탄소년단이 4관왕에 오른 후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일본 사회는 이런 현상이 탐탁지 않은 눈치다.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는 신오쿠보(도쿄 신주쿠 인근 지역) 한인타운을 걷는 젊은이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방탄소년단이 원자폭탄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는데도 좋아하느냐” 같은 원색적인 질문을 던진다. 방탄소년단 멤버 지민은 2017년 제작한 유튜브 다큐멘터리 ‘번 더 스테이지’에서 원자폭탄이 터지는 사진, 광복을 맞아 만세 하는 한국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모습을 드러냈다. 

일본 한류 팬들은 “정치와 문화는 별개라고 생각한다”는 우문현답을 내놓는다. 방탄소년단은 일련의 소동에도 불구하고 2월 개최된 ‘일본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5관왕을 휩쓸었다.

일본인 멤버가 있는 아이돌 그룹은 악화된 한·일 관계가 그어놓은 심리적 저항선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 한국 연예기획사와 일본 아이돌 그룹 AKB48 사단의 합작 프로젝트 ‘아이즈원’은 최근 방송 출연 빈도가 압도적이다. 역시 일본인 멤버가 소속된 ‘트와이스’는 NHK 연말 대표 쇼 프로그램 ‘홍백가합전’에 2년 연속 출연했다. 연예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는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최근 데뷔를 준비 중인 그룹 ‘트레저 13’에 일본인 4명을 멤버로 발탁했다. 한·일 뮤지션 간 교류도 늘어나는 추세다.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는 일본 인기 록밴드 ‘글레이’의 보컬 테루(TERU)는 한국 아이돌 ‘펜타곤’의 일본 데뷔 앨범 작곡에 참여했다.

양국 간 역사가 꼬아놓은 논쟁의 실타래들은 가끔 민간교류의 발목을 잡는다. 한국에서도 팬을 보유하고 있는 일본 록밴드 ‘스파이에어(SPYAIR)’의 보컬 이케(IKE)는 인스타그램에 일본해가 표기된 지도를 올렸다가 곤욕을 치렀다.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한국어로 사과문을 올렸다가 이번에는 일본인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친한파 일본 연예인들은 인터넷상에서 비방에 시달린다. 거물 가부키 배우 우메자와 토미오(梅沢富美男)는 방송에서 한국 무용가 이매방 선생에게 춤을 배우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밝혔다가 “실은 재일 한국인 출신일 것”이라는 입방아에 올랐다.

얼어붙은 한·일 관계에도 활발한 대중문화 교류는 양국 간 민간교류의 증대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지난해 방한 일본인 관광객은 전년 대비 27.6% 증가한 294만8527명에 달했다. 부산과 후쿠오카를 오가는 고속선 ‘비틀’ 탑승객 통계가 흥미롭다. 지난해 12월 28일부터 올 1월 6일 사이 이 노선 탑승객은 일본인이 전년 동기 대비 20.8% 증가한 3511명, 한국인 이용자는 16.5% 감소한 3232명으로 한·일 승객 비율이 역전됐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남녀는 양가의 반대에도 애정을 불태웠다. 사회심리학은 이를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데서 비롯되는 심리적 반발에 의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대립을 몰고 가는 사회적 분위기만이 민간교류 증대의 이유는 아닐 것이다. 이웃에게 관심을 두고 다가가는 것은 사회적 동물의 당연한 본능이니까. 천진난만하게 서로를 챙기는 한·일 합작그룹 멤버들 그리고 그들을 응원하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저릿하다. 양국을 오가며 서로의 문화를 즐기는 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들이 싸우든 말든 관심없다.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며 서로를 알아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