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파리 특파원 시절인 2010년 9~10월, 프랑스에선 연일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계속됐다. 사르코지 정부가 추진했던 정년 연장 및 연금 개혁안에 국민이 거세게 반발한 것이다. 연일 시민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어나와 ‘정년 연장 결사반대’를 부르짖었다. 나중엔 중고생까지 시위에 가세했다. ‘정년 연장이 청년 실업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이란 이유였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직장 다니면 월급 도둑)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눈엔 프랑스인의 시위가 이상했다. ‘직장에서 더 오래 일하게 해 주겠다는데 왜 반대하지? 장년층이 일을 더 하면 청년들 부담이 줄어들 텐데, 청년들은 왜 반대할까?’

우파인 사르코지 정부는 국민의 격렬한 저항을 돌파해 연금 개혁을 성사시켰다. 노동자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연장하고, 퇴직연금 수령 시점을 65세에서 67세로 각각 2년씩 늦추는 개혁안을 관철했다. 하지만 몇 년 뒤 집권한 사회당 정부는 우파 정부가 천신만고 끝에 해낸 연금 개혁을 원점으로 되돌려 버렸다. 프랑스 사례는 정년 연장 문제를 포함한 연금 개혁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우리나라 대법원이 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을 만 65세라고 판결했다. 가동연한이란 건설 노동자, 가사 도우미 등 육체노동자가 소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한의 상한(上限)을 의미한다. 대법원 판결로 우리나라에서도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용상 연령 차별 금지 및 고령자 고용 촉진에 관한 법률’을 통해 정년을 60세로 의무화했고, 2017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앞서 대법원이 노동자 가동연한을 55세에서 60세로 올린 뒤 법제화까지는 28년이 걸렸는데, 워낙 고령화 속도가 빨라 다음 정년 연장은 이렇게까지 많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은 79.7세, 여자는 85.7세에 달한다. 30년 전과 비교하면 남자는 13.7세, 여자는 10.4세나 늘어났다. 인간 수명은 앞으로 더 늘어나 조만간 평균 100세까지 사는 ‘호모 헌드레드’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게 인구학자들의 전망이다.

올해 100세를 맞이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인생을 0~30세, 30~60세, 60세 이후 등 세 시기로 분류한다. 30세까지는 무조건 많이 배우며 인생의 뿌리를 만드는 시기이며, 60세까지는 일을 하며 가치를 좇고 인간관계를 쌓는 시기라는 것이다. 60세 이후는 제2의 인생을 살며 열매 맺는 시기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60세쯤 돼야 철이 든다. 계속 일하고 책을 읽으면 75세까지도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친구들과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였느냐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60~75세라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한다. 저명 심리치료사 토머스 모어는 ‘나이 공부’라는 책에서 은퇴(retire)를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re-tire) 시기라고 정의했다. 은퇴 이후 바퀴를 새로 장착하고, 새로운 열정으로 새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들도 고령화 추세를 반영해 정년을 연장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선 연령 차별 금지 명분으로 정년제도를 아예 폐지했다. 독일에선 2029년까지 정년을 67세로 연장하기로 했고, 일본의 경우 2025년부터 정년을 65세로 연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정년이 65세로 연장되면 60세 은퇴 후 국민연금을 받게 되는 65세까지 5년간 ‘소득 공백’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정년 연장이 일자리와 연금 부담을 놓고 장년층과 청년층이 다투는 ‘세대 전쟁’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독일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약 100년 전 “청년 세대는 ‘진보적’이며, 구세대는 ‘보수적’이라는 가정만큼이나 허구적인 것은 없다”고 통찰했다. ‘노인-보수, 청년-진보’라는 고정관념은 ‘밥그릇’ 앞에서 허망하게 깨질 수 있다. 앞으로 정년 연장 이슈가 부각되면 우리나라에선 프랑스처럼 청장년 세대가 한편이 되기보다 세대 간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