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5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민족주의의 득세로 유럽연합(EU) 분열 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각 나라에서 극우 포퓰리즘, 배타적 민족주의 정파가 약진하고 있는 탓에 이번 선거는 반(反) EU 대 친(親)EU 간 대결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4일 EU의 쇄신을 촉구하는 칼럼을 회원국 28개 일간지에 공개했다. 일각에서는 유럽의 차세대 리더로 자리매김하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야망이 드러났다고 평가한다.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프랑스 대통령, 파리정치대학, 경제산업부장관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 파리정치대학, 경제산업부장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유럽이 이렇게 위험에 처한 적도 없었다. 상징적인 사건이 브렉시트다. 브렉시트는 유럽 위기의 상징이다.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충격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자국민의 요구에 유럽이 부응하지 못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브렉시트는 유럽의 함정도 상징하고 있다. 이 함정은 거짓과 파괴력 있는 무책임 위에 자리하고 있다.

누가 영국인에게 브렉시트 이후 미래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었나. 누가 그들에게 유럽 시장으로의 접근성을 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말했나. 누가 아일랜드 평화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언급했나. 민족주의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것은 대안 없는 거부다. 이 함정은 유럽 전체를 위협한다. 가짜 뉴스에 기댄 거짓 선동자들은 무엇이든 약속한다.

우리는 여기에 굳세고 자랑스럽게, 명쾌하게 맞서 통일 유럽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초토화된 대륙에서 평화, 번영, 자유를 기치로 화합을 이룬 것은 역사적인 성공이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성공이 우리를 지금까지 보호하고 있다. 어떤 나라가 강대국의 공격적 전략에 맞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 어떤 나라가 ① 디지털 거인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유럽을 이끄는 힘인 유로화 없이는 금융 자본주의 위기에 저항할 수 없다. 유럽은 교실 재단장을 비롯해 도로 건설, 초고속 인터넷망 설치 등 하루에도 수천 개씩의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평화처럼 결코 당연하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나는 유럽을 방어하고 전진시키기 위해 프랑스라는 이름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함정에 직면해 있는 우리는 더 빨리, 더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한다. ‘현상 유지’와 ‘체념’이라는 함정이다. 세계적 위기에 직면한 유럽인은 자주 우리를 향해 이렇게 묻는다. “유럽은 어디에 있는가. 유럽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의 눈에 유럽은 영혼 없는 시장이 돼버렸다.

유럽은 단순한 시장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다. 단결의 가치를 보호하는 국경 개념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자들은 유럽연합(EU) 해체를 통해 국가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됐다. 우리를 단결시키고, 자유롭게 하고, 보호하는 것이 바로 유럽이라는 문명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는 것도 잘못됐다. 이는 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유럽인의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유럽 문명을 정치·문화적으로 재창조할 필요가 있는 순간, 바로 유럽 쇄신의 순간이다. 고립과 분열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자유·보호·진보 세 가지 야망을 갖고 함께 쇄신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

유럽은 인간의 자유, 의견과 창조의 다양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첫 번째 자유는 민주적 자유다. 투표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외세의 압력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자유다. ‘유럽 민주주의 보호 기구(European Agency for the Protection of Democracies)’ 설립을 제안한다. 사이버 공격과 조작으로부터 선거 과정을 보호할 수 있는 기구다. 이 밖에 유럽 정당에 대한 외국 정부의 자금 지원, 인터넷상의 증오와 폭력적인 선동도 금지해야만 한다.

EU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경이 없다면 어떤 공동체도 소속감이 생길 수 없다. 국경은 안보에 있어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② 솅겐조약을 재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참여를 원한다면 책임과 연대의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 EU 차원의 국경군과 유럽 망명 사무소를 세워야 한다.

국방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지난 2년간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방향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방위와 안보 조약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 동맹국과 관련한 기본 의무, 즉 국방 지출 증액, 상호 방위 조항 등과 협력해 결정돼야 한다.

국경은 공정한 경쟁도 보장해야 한다. 세상에 어느 나라가 규칙을 무시하는 나라와 무역을 지속할까. 침묵 속에서 피해를 볼 수는 없다. 환경 기준, 데이터 보호, 공평한 세금 납부 등 우리의 전략적 이익과 근본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기업을 처벌하는 등 ③ 무역 정책을 다시 세워야 한다. 경쟁 상대인 미국과 중국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진보 정신을 되찾자

유럽은 단순히 세계 2위 강대국이 아니다. 유럽은 항상 진보의 기준을 정의하는 데 앞장서왔다. 이를 위해서는 경쟁보다는 융합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사회보장제도 발원지인 유럽은 동서남북 노동자를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도입해야 한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보장하고, 각국에 유럽 기준의 최저임금을 일괄적으로 적용시켜야 한다.

환경 문제에서도 앞장서야 한다. ‘기후 문제’라는 빚을 청산하지 않는 한 우리는 미래 세대에 떳떳할 수 없다. EU는 ‘2050년까지 탄소 제로’ ‘2025년까지 살충제 반감’ 같은 목표를 설정하고, 유럽기후은행을 새로 도입해야 한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 유럽연합 투자계획(IPE)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관들도 기후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

유럽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앞을 내다봐야 한다. 주요 플랫폼에 감독을 배치해 기업들을 규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럽혁신위원회(EIC)에 미국과 비슷한 수준의 예산을 배정해 혁신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

또 투자, 학업 협력, 소녀 교육 등을 통해 아프리카 발전을 지지해야 한다.

자유, 보호, 진보라는 기둥 위에서 유럽을 쇄신해야 한다. 해결책 없는 민족주의자들이 국민의 분노를 이용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몽유병자처럼 걸어 다닐 수 없다.

우리는 희망에만 사로잡혀 평소처럼 생활할 수도 없다. 유럽식 휴머니즘은 행동을 요구한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변화의 일부가 되기 위해 일어서고 있다.

나는 EU 기관과 회원국과 함께 ‘유럽을 위한 콘퍼런스(Conference for Europe)’를 연말을 목표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서 조약 개정을 비롯해 유럽에 필요한 모든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논의할 수 있다. 반드시 시민들과 협력해 학계와 기업, 노동계 대표, 종교 지도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콘퍼런스를 통해 유럽의 우선순위들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유럽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지배할 것이다. 이 유럽에서, 영국이 자신의 진짜 위치를 찾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브렉시트’ 위기는 교훈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함정에서 빠져나와 앞으로 있을 유럽의회 선거와 프로젝트를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역사 속 한 장면 이상의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시민들의 몫이다. 유럽 쇄신의 길을 함께 계획하는 것, 이것이 내가 제안하는 바다.


Tip

지난해 5월 EU에서 ‘일반개인정보 보호법(GDPR)’이 2년간의 유예 기간을 거친 후 발효됐다. 개인 정보에 대한 자기 선택권을 강화한 내용이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글로벌 IT 기업들은 빅데이터와 머신러닝 시대를 앞두고 ‘빅데이터’ 명목으로 개인 정보를 수집해왔는데, 이 과정에서 해킹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규제 당국이 칼을 뽑아 든 것이다. 국경을 넘는 보호 범위를 적용해 현존 최강의 개인 정보 보호법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페이스북, 애플, 트위터, 링크드인 등이 GDPR법 위반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

‘솅겐(Schengen)조약’은 1985년 룩셈부르크 남부 솅겐에서 국경을 맞댄 벨기에·프랑스·독일·룩셈부르크·네덜란드 5개국이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조약을 맺은 데서 시작했다. EU 단일 시장의 초석으로 회원국 국민간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약이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 중동·아프리카계 난민 문제가 심화하면서 이 조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작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이 국경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 칼럼에서 국경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미국, 중국과 같은 유럽 우선의 보호무역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를 가진 유럽은 미국발 보호무역주의의 직격탄을 맞았다. GDP 대비 공산품·서비스 수출 비중(2017년 기준)은 유럽이 28%로 미국(12.1%), 중국(19.6%), 일본(18%)보다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