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지난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이례적인 일이 있었다. 게임 회사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대표가 출석한 것이다. 국정감사장에 게임 회사 대표가 온 것은 온라인 게임에서 확률형 아이템이 사행성을 유발한다는 논란이 있자 일부 국회의원들이 김 대표를 증인으로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확률형 아이템은 게임 이용자가 정해진 아이템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게임 회사가 정한 확률에 따라 지불한 금액보다 더 가치가 높거나 또는 가치가 낮은 아이템이 무작위로 지급되는 방식으로 판매된다. 게임 이용자는 아이템이 지급되기 전까지 어떤 아이템을 구매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흔히 ‘랜덤박스’ 혹은 ‘가챠’라고도 불린다.

국회의원들의 비판적 질의에 김 대표는 “확률형 아이템은 공정하게 아이템을 나눠주기 위한 기술적 장치”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무작위 확률형 아이템 구매가 게임 회사 매출의 대부분을 책임지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이 김 대표의 말을 믿지 않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지존템’이라고 불리는 최상급 아이템의 획득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김 대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평범하게 게임을 즐기는 이용자들도 최상급 아이템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상급 아이템은 당첨 확률이 매우 낮기에 상당한 수준의 돈을 지불해, 반복적으로 가챠를 구매하지 않고서는 당첨되지 않는다. 게임 이용자들은 반복적으로 가챠를 구매하는 행위를 ‘현질(현금질이라는 속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확률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은 ‘현질 없는 지존템(최상급 아이템)은 없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많은 사람이 기꺼이 지갑을 연다는 것이다. 당첨 때의 짜릿한 스릴도 있겠지만, 지존템을 얻기만 한다면 단번에 게임 세상의 최강자가 돼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플레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사행성 논란의 핵심이다.

기업의 연구·개발(R&D)은 여러모로 확률형 아이템을 구매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아주 성공적인 R&D는 시장의 판도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끄는 일련의 인공지능(AI) 관련 연구가 좋은 예다.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구글의 AI인 알파고와 한국 프로기사 이세돌 9단이 벌인 바둑 대국)가 인류의 미래상을 바꾸었을 정도다. 확률형 아이템을 성공적으로 획득하는 것이 플레이어를 게임 세계 최강자로 만드는 것처럼 R&D의 성공은 비즈니스 세계의 ‘지존템’을 갖는 것과 같다.

R&D는 가챠처럼 성공 확률이 낮다.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어느 정도 담보된 D(개발)와는 달리 R(연구)은 실패하는 것이 정상이다.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발표되는 AI 분야도 한때는 대부분의 연구자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손을 뗀 적이 있었다. ‘AI 겨울’이라 불리는 20여 년의 기간이다. 딥러닝(학습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AI컴퓨터)의 아버지 제프리 힌튼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가 심층신경망에 대한 연구를 뚝심 있게 진행하지 않았다면, AI 겨울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그 엄혹한 시절 캐나다 고등연구원(CIFAR)이 힌튼 교수에게 500만달러(약 56억3400만원)의 연구비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면, 알파고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R&D는 비싸다. 게다가 성공 확률은 낮다. 세상을 바꾸는 기술은 충분한 규모의 지속적인 R&D 투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현질 없는 지존템이 없는 것처럼.

혁신만큼 우리 금융 산업과 거리가 먼 단어도 없다. 2015년 기준 국내 금융업 R&D 투자는 70억원에 불과하다. 연 매출 2조원 정도의 중견 제조업체 연구·개발비 수준이다. 총자산이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에 육박하는 2400조원이고, 예대마진으로 매년 10조원이 넘는 순이익을 올리는 우리 금융업의 규모를 생각하면 참담하다 못해 창피한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R&D 집약도(국내총생산 대비 R&D 투자 비율)는 3.57%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등이다. 하지만 금융업의 R&D 집약도는 0.002%다. 압도적인 꼴찌다. 국내 35개의 산업군 중 금융업보다 R&D 집약도가 떨어지는 것은 부동산중개업뿐이다.

대한민국엔 금융 R&D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혁신적 금융기술이 자생적으로 생겨난다면 이는 기적이다. 사실 사기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2016년 3월 12일 오후 구글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맨 오른쪽)이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이세돌 9단(가운데)과 구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국인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기자회견장을 방문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2016년 3월 12일 오후 구글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맨 오른쪽)이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이세돌 9단(가운데)과 구글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국인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기자회견장을 방문했다. 사진 조선일보 DB

금융, ‘현질’로 ‘지존템’ 획득해야

실제로 규제가 금융 혁신의 걸림돌일 수 있다. 하지만 규제 개혁이 곧 금융 혁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얻을 만한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지존템’은 고사하고 ‘일반템(평범한 수준의 기술)’도 없다.

핀테크 유관 회의에 가면 민망한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공부를 안 해놓고 교복이 싸구려라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는 중‧고등학생을 보는 느낌이다. 규제를 풀어주면 금융 혁신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부가 진정 대인배로 보일 정도다. 어쩌면 ‘호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비판에 최근 2~3년 사이에 은행들이 기술력을 가진 핀테크 업체에 대한 투자를 많이 늘렸다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기술은 명품백이 아니다. 산다고 바로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돈 주고 사온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사온 금융회사가 충분한 자체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내부 R&D가 없는 한국의 금융 업체들이 기술력을 가진 회사에 투자하는 것은 순수한 금융 투자일 뿐이다. 이를 구글의 딥마인드(영국의 인공지능 개발 회사) 인수와 같은 기술 투자라 생각하는 것은 아주 큰 착각이다.

국민에게 편리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나아가 세계무대에서 활약해 새로운 경제 성장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우리 금융 산업이 나아갈 길이라 진정 믿는다면 당장 R&D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후발주자에게 경쟁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남들보다 늦게 게임을 시작했으니 ‘현질’을 해서라도 따라잡아야 한다.

현질도 지갑이 두둑해야 성공하는 법이다. 금융 R&D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규모의 경제를 달성해야 한다. 따라서 금융 R&D 투자는 정부와 금융지주사에 의해 주도돼야 한다. 현 시점에서 규모 있는 R&D를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주체는 그 외엔 없기 때문이다.

R&D는 아주 많은 면에서 가챠와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가챠의 실패는 다음 시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반면 R&D의 실패는 오롯이 조직에 경험으로 축적된다. 가챠와 달리 R&D는 실패마저도 조직의 역량을 강화시킨다. R&D가 도박이 아닌 투자인 이유다. R&D를 ‘현질’하라. 이를 통해 ‘지존템’을 획득하라. 우리가 금융 변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