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3월 22일은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7월 양국이 상호 관세를 부과하며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금도 양국은 무역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브라질과 러시아 등 신흥 경제 5개국을 일컫는 용어 ‘브릭스(BRICs)’의 창시자 짐 오닐 전 골드만삭스 회장은 이번 칼럼에서 미·중 무역전쟁 등 여러 사례를 들며 경제학의 통념들이 점점 깨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짐 오닐(Jim O’Neill)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소장, 서리대 박사, 전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
짐 오닐(Jim O’Neill)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소장, 서리대 박사, 전 골드만삭스 자산운용 회장

경제학은 자연 과학의 엄격함을 갈망하는 학문이지만 결국 사회 과학의 한 분야다. 지난 40년 동안 어느 시점에서도 지금처럼 이 같은 사실이 명백했던 적은 없었다. 지난 수십 년간 전통적인 거시 경제 분석은 ① ‘필립스 곡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과 물가상승률 간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오래된 이론이다. 실업률이 일정 수준 밑으로 떨어지면 물가가 오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부터는 유효하지 않다. 실제로 영국과 미국은 모두 실업률이 역대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낮다.

통화 정책 관련한 통념도 깨지고 있다. 수년간 지속된 양적완화(QE)와 초저금리 정책으로 시중에 많은 돈을 푼 선진국(특히 유로존 국가)들의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중앙은행의 목표치를 밑돌고 있다. 또 최근 경제학자들은 ② 임금의 하방경직성에도 의문을 품고 있다. 이 개념은 노조의 힘이 지금보다 강했던 1960~70년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일종의 ‘유산’이다. 하지만 ‘직원들이 항상 임금(혹은 노동 시간) 삭감에 저항할 것’이라는 가정은 이제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

사실 노조 영향력의 감소는 필립스 곡선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일자리가 생겨도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과 임시직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가 확대되면 그에 비례해 임금 수준도 정체 내지는 하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낮은 임금은 물가상승률 인상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노조 영향력의 감소가 지속적으로 낮은 기업 생산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숙련되지 않은 비정규직과 임시직의 증가가 총생산성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조 영향력이 약해 직원을 쉽게 고용하거나 해고하고 임금 수준을 조절할 수 있는 회사의 경우를 보자. 이런 회사는 다음 경기 상승기가 올 때까지 새 건물과 새 장비에 대한 막대한 금액을 지불(투자)하는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노동에 투입되는 비용 절감을 통해 수익성을 맞추는 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낮은 노동 생산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비정규직·임시직 감축 등 노동 시장 유연성을 떨어뜨려 임금을 올리는 것이다. 만약 회사 경영진과 경제학자들이 이 얘기에 반대한다면, 그들은 노동 생산성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당장 멈춰야만 한다.

또 다른 미시 경제학 이론도 흔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이 큰 이익을 거두면 해당 시장에 새로운 진입자들이 들어오게 된다. 이 경우 이론적으로는 이 기업의 이익은 줄어들고 그 이익은 새로운 진입자들로 확산된다. 이어 이 기업은 투자를 더 하게 되고, 노동 생산성과 임금도 상승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이 이론을 입증할 수 있는 사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기업의 이익은 증가하고 시장 지배력은 높아지고 있다.

무엇이 이 상황들을 설명해 주는가. ‘자본주의는 결국 실패한다’는 칼 마르크스의 말이 옳은 것일까. 아니다. 이런 상황은 오히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장, 규제정책, 인센티브 제도 등이 변화하면서 발생한 결과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를 막을 수단이 부족해진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③ 자사주 매입(buy back)을 제한하는 것이다. 자사주 매입은 기업 임원들이 생산성 향상에 투자하지 않고도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나 다름없다.


3월 28일 미국과 중국 무역 대표단이 베이징에서 8차 무역협상에 돌입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운데), 스티브 므누신 재무부 장관(가운데 뒤 안경 쓴 인물)이 중국 베이징 호텔에 도착하는 모습. 류허 중국 부총리도 협상이 끝난 다음 주 중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사진 EPA 연합
3월 28일 미국과 중국 무역 대표단이 베이징에서 8차 무역협상에 돌입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운데), 스티브 므누신 재무부 장관(가운데 뒤 안경 쓴 인물)이 중국 베이징 호텔에 도착하는 모습. 류허 중국 부총리도 협상이 끝난 다음 주 중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사진 EPA 연합

다행히도 최근 영국 정치권에서는 세금·규제 정책이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을 부추긴다는 점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고 있지 않거나, 사회적 과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업은 ‘공짜 점심’을 즐길 수 없어야 한다.

예컨대 영국 건설 회사 퍼시몬은 실적이 매우 좋다. 그러나 이는 연구·개발(R&D) 투자 등에 따른 과실이 아니다. 영국 정부가 처음으로 주택 구입자들을 위한 특별 대출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의 제약 회사들은 신약을 구입하거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임상시험을 할 때에만 R&D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차원에서 경제학의 통념을 깨는 가장 큰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경제 개방 정책 이후 중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하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중국의 발전을 면밀히 지켜본 사람들은 중국의 명목상 공산주의 정치·경제에 자본주의 이념이 상당히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서방 경제학자들에 의해 외면받고 있다.

최근 싱가포르 경제학자 키쇼어 마부바니가 현지 언론 ‘스트레이트 타임스’에서 지적했듯이, 중국 정보통신기술(IT) 기업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강경한 태도는 전적으로 이념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화웨이가 상호 합의된 국제적 규칙을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좀 더 균형 잡힌 전략을 채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안을 무역전쟁 협상 카드로 채택했다. 이는 우리 모두가 걱정해야 할 문제다.


Tip

영국 경제학자 필립스가 1950년대 정립해 경제학 교과서에 수록돼 온 이론이다. 이 이론대로라면 실업률과 물가는 거꾸로 움직인다. 실업률이 떨어지면 임금 인상과 함께 물가가 오르는 것이 일반적이란 뜻이다. 하지만 지금 미국 경제는 그렇지 않다. 실업률도 낮고 물가도 2%대의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내려가야 할 가격이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내려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임금의 하방경직성이란 강력한 노동조합, 최저임금제, 장기 노동 계약 등으로 임금 인하가 어려운 상황을 뜻한다.

주식을 사고파는 주체가 주식을 발행한 회사일 때 그 주식을 자사주(자기 주식)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는 목적은 경영권 방어나 주가 안정, 회사에 기여한 종업원에 대한 공로주 지급 등을 위해서다. 자사주에는 배당과 의결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