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세계 최대 통신장비회사인 중국 화웨이는 창업 초기 신입사원에게 야전침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회사에서 밤낮 없이 일하며 열정을 바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한동안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야전침대를 물려주는 문화가 있었다. 지금도 화웨이 본사 사무실 곳곳에서 야전침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화웨이는 중국에서도 야근이 많은 기업으로 유명했다. 업무가 많아 애인과 헤어졌다거나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수시로 올랐다. 2008년엔 업무 스트레스로 직원이 자살하면서 사회적 이슈가 된 일도 있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사무실의 야전침대는 점심식사 후 낮잠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중국에서 장시간 노동과 야근은 화웨이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테크산업에선 ‘오전 9시 출근, 오후 9시 퇴근, 주 6일 근무’를 뜻하는 ‘996 근무제’가 일반적이다. 그야말로 인력을 ‘갈아넣어’ 목표를 달성하고 성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피땀(血汗) 문화’라고도 한다.

중국 2위 전자상거래 업체인 징둥의 류창둥 회장은 “창업 초기엔 알람시계를 두 시간마다 맞춰놓고 고객들에게 24시간 서비스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996이 아니라 ‘997(일주일 내내 근무)’ ‘007(자정에 출근, 자정에 퇴근, 주 7일 근무)’ 같은 과장된 표현이 나올 만하다.

중국의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8시간, 주 44시간이다. 노사 합의가 있다면 하루 2시간, 한달 최대 36시간까지 추가 근무할 수 있다. 그런데 996 근무제의 일주일 근무시간은 72시간에 이른다. 명백히 위법이지만 그동안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불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지난 3월 말 한 프로그래머가 세계 최대 개발자 플랫폼인 깃허브(GitHub)에 ‘996.ICU’ 사이트를 개설했다. 996 근무를 계속하다가는 결국 중환자실(ICU)에 실려간다는 의미다. 일종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촉구하는 이 사이트에 대해 중국 젊은 세대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고, SNS를 달궜다.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이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마윈은 사내 행사에서 “젊었을 때 996을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느냐”며 “996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라고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젊은 네티즌들이 폭발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붉은 권귀(권력자와 귀족)와 자본가가 다스리는 권귀 자본주의 국가”라는 체제비판적인 반응까지 나왔다.

놀란 관영매체들이 젊은 세대 달래기에 나섰다. 인민일보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분투 숭상)과 996 근무 강제는 다르다”고 했다. 신화통신은 “분투는 제창하고 996은 퇴장해야한다”라고 했다.

중국의 996 논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과거에도 996에 대한 비판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렇다 할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소득 증가와 함께 삶의 여유를 중시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고, 기성세대와 가치관이 전혀 다른 바링허우(1980년대생), 주링허우(1990년대생) 세대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 큰 변수다.

장시간 노동과 워라밸은 한국에서도 뜨거운 이슈다. 근로시간이 꾸준히 단축되는 가운데서도 아직 개발연대 시절의 야근·특근 문화가 남아있는 곳이 적지 않다.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월화수목금금금’의 근로환경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주 52시간제 도입 및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를 둘러싼 혼선과 갈등의 배경이다.

중국에 비해 한국이 몇 발자국 앞서 가고는 있지만 상이한 가치관의 충돌,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 세대 간 갈등 구조는 유사하다. 한국과 중국 모두 상당한 혼란을 겪기는 하겠지만 근로시간 단축과 함께 일하는 방식의 패러다임 변화가 불가피하다. 공산주의도 워라밸의 시대정신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중국이 보여주고 있다.

김기천 조선비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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