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

한국이 세계에서 7번째로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 이상이면서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인 국가)에 가입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경험한 나라로는 첫 가입이기에 더욱 뜻깊다. 30-50클럽이 작위적인, 소위 ‘국뽕(국가와 히로뽕을 합친 말로 심한 국수주의에 대한 속어)’을 위해 만들어진 용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36년간의 식민 지배와 분단 전쟁을 겪은 나라가 이뤄낸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성취를 굳이 우리가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어떤 기준으로도 선진국인데 국뽕 좀 맞는다고 나쁠 것 뭐 있는가.

경제적 성공과 동시에 우리가 받은 선물이 있다. 수명이 극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1980년대 초반까지 환갑은 가장 큰 가족행사였다. 하지만 요즘 성대한 환갑잔치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60을 넘기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이후 20년간 우리의 기대수명은 8년이 증가했다. 1996년엔 OECD 평균보다 2년가량 덜 살았으나, 이제는 1.5년 정도 더 오래 산다.

우리의 기대수명이 다른 나라보다 빨리 증가한 이유는 보편적 의료 서비스 체계가 급격히 강화됐기 때문이다. 1990년 중하위권 수준이었던 ‘보건의료 접근성 품질지수(HAQ Index·미국 워싱턴대학이 세계 195개국 보건의료의 접근성과 품질을 평가한 지수)’가 2015년엔 세계 최상위권으로 나타난 것이 그 증거다.

미국 유학 중 농구를 하다 발목을 심하게 삔 적이 있다. 규정에 따라 체육관 관리인이 병원 응급실로 이송시켜 줬다. 학교 의무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엑스레이 두어 장을 찍고 뼈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의사는 반깁스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한 달 후 6500달러(약 770만원)짜리 청구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다행히 보험이 적용돼 최종적으로 500달러(약 59만원) 정도를 지불한 기억이 있다.

발목 부상은 모든 동네 농구인의 숙명이다. 2년 후 같은 부상을 또 당했다. 이번엔 병원에 가지 않았다. 다만 그때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아서인지 지금도 왼쪽 발목이 좋지 않다. 한국에서 다쳤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다. 세계 최고 수준의 보편적 의료 서비스 덕택에 실력 있는 의사 선생님을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을 키우지 않았을 거라는 의미다. 우리가 장수하는 이유다.

하지만 장수가 꼭 축복인 것은 아니다. 노인빈곤율(중위소득의 절반에도 소득이 미치지 못하는 노인 비중)이 5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꼴찌다. 둘 중 한 명은 은퇴 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소득이 없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에겐 오래 사는 것이 저주일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미묘한 모순이 발생한다. 우리는 일곱 나라밖에 없는 30-50클럽 가입 국가가 아니던가. 그리고 성장의 과실은 ‘한강의 기적 세대’, 즉 지금의 50대 중반 이상의 세대가 가장 많이 가져갔다. 그 많은 과실은 어디로 사라졌기에 그 세대의 절반이 빈곤한가.

노후 빈곤의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있다. IMF외환위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종신 고용이 보장됐다. 급속한 경제 성장 덕이다. 이는 농경사회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노후소득보장 시스템, 즉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데 소득을 다 쓰는 대신, 자녀가 성인이 되면 은퇴한 부모의 생계를 책임지는 구조를 유지하는 원동력이었다. 높은 출산율과 짧은 기대수명 덕에 노년부양비(경제활동인구인 15~64세 인구 100명당 부양할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비율)가 한 자릿수로 매우 낮게 유지된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IMF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기업은 더 이상 영속적이지 않다. 종신 고용은 신기루가 됐다. 고도성장이 끝나며 일자리도 줄어든다. 자녀가 부모를 모실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연금제도도 늦게 도입된다. 지금의 노인 세대는 부모를 모셨고, 자녀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지만, 자신의 노후는 준비하지 못했다. 이들이 빈곤한 이유다.

출산율 저하로 노년부양비는 급속한 증가가 예정돼 있다. 지금은 17(경제활동인구 100명이 노인 17명을 부양) 정도이지만 50년 후에는 89가 된다. 예상보다 훨씬 낮아진 최근의 출산율을 반영하면 경제활동인구 1명이 1명 이상의 노인을 부양해야 할 수도 있다. 노후빈곤문제는 우리 국가공동체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다.

자식들이 노후를 보장해주는 전통적인 노후소득보장체계는 끝났다. 우리는 자신의 노후를 각자 책임져야 한다. 희망적인 것은 연금제도가 정착되어 간다는 것이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그리고 세제 혜택이 있는 개인연금을 감안하면 평범한 직장인은 소득의 20~30% 정도를 노후를 위해 저축하고 있다. 필자의 계산으로는 연금소득만으로 60% 이상의 소득대체율(생애 평균소득에 대한 연금소득의 비율)을 달성하는 인구가 90% 이상이 될 수 있다. 연금납입금이 ‘잘’ 운용된다면 말이다.

개인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자산 운용은 펀드 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불확실성이 있는 개인의 소득과 소비를 모두 고려해 투자의 규모를 결정함과 동시에, 미래에 필요한 금융 목표를 달성함에 모자람이 없도록 좋은 투자 결정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난도의 의사결정이다. 평범한 사람은 풀 수 없는 문제다. 난이도가 높은 만큼 전문적인 서비스는 비싸다. 아니,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제공되는 전문적인 서비스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없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아닌가. 어려운 문제는 기계에 풀라고 하면 된다. 개발 과정에서 많은 비용과 새로운 기술이 요구되겠지만 다른 방법보단 훨씬 저렴할 것이다.

AI 등 첨단 기술을 이용해 경제 활동을 하는 모든 인구에게 자신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알려줄 수 있다. 한 번 기술을 개발해 놓으면 지속적으로 재정을 투입해 ‘돈 퍼주기’를 할 필요가 없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국가가 첨단기술 활용해 국민에게 노후자산 운용 방법 제시해야

노후소득보장은 국가가 가지는 책무인 만큼 이런 정교한 분석 기술과 방법을 국가가 만들어 전 국민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것은 어떨까. 필자는 그런 서비스에 필요한 핵심 기술 하나를 개발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이 플랫폼을 만들어 전 국민에게 해당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그 기술을 무료로 자유로이 활용하시라 국민연금에 제안한 바 있다. 금융업체들이 자발적으로 기술 개발을 해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요원하므로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본 칼럼에서 이미 다뤄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금융 산업은 기술 개발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이다.

펀드 운용은 주어진 시장에서 최대한 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특정한 병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 개인의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자산 운용은 복합적인 진단과 처방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의사의 진료에 비유될 수 있다. 노후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다.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가 우리의 수명을 늘렸듯이,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자산운용서비스가 보편화된다면 충분히 노후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기술을 통한 노후소득보장이다. 이정도면 4차 산업혁명이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

김우창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 교수

  • 목록
  • 인쇄
  • 스크랩
  • PDF 다운
ⓒ 조선경제아이 & econom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