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얼마 전 미국 의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월가의 7개 대형 은행 CEO들이 불려나왔다. 텍사스주 공화당 의원 로저 윌리엄스가 이들을 상대로 “당신은 사회주의자인가, 자본주의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은행 CEO들의 이념적 정체성이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답변이 정해져 있는 하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FT)는 “그런 질문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워싱턴 정가의 기류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했다.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 사회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유일한 나라로 꼽힌다. 독일 사회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20세기 초에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가 없는가’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좀바르트의 결론은 “미국은 유럽보다 더 자유롭고 더 평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밖에 세습 귀족이 없어 계급의식이 싹트지 않았다거나 인종 갈등이 계급 갈등을 압도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최근 사정이 달라졌다. 민주당 유력 정치인들이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사회주의적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거대 정보기술(IT) 기업 해체 및 인수·합병(M&A) 제한을,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자사주 매입 제한을 주장하고 있다. 초선 하원의원이지만 가장 주목받는 스타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는 1000만달러 이상 소득을 올리는 부자에 대한 최고 소득세율을 70%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젊은 세대의 이념적 지향도 바뀌고 있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서 18~29세 젊은이 중 51%가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인식한다고 답변했다.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인식한다는 답변은 45%로 2010년 68%에서 크게 하락했다. 지난 2016년 대선 예비선거에서 젊은 유권자들은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표를 버니 샌더스에게 몰아줬다. 그래서 ‘밀레니얼 사회주의(Millennial Socialism)’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1% 대 99%’로 상징되는 불평등 심화가 원인이다.

일부 대기업 CEO와 기업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미국 최대 금융회사인 JP모건의 CEO로 ‘월가의 황제’로 불리는 제이미 다이먼은 최근 주주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성공한 대기업 없이 부강해진 나라는 없다”며 “사회주의는 재앙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동시에 자본주의의 결함도 인정하면서 강력한 사회안전망을 갖추고 SOC(사회간접자본)와 교육 등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재원 마련 방안의 하나로 자신과 같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고 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창업자인 레이 달리오는 “나는 자본주의자이지만, 자본주의가 망가졌다고 생각한다”며 “자본주의가 진화하거나 아니면 멸망하는 갈림길에 서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달리오 역시 하위 60%의 생산성과 소득을 늘리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기 위해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애국적 백만장자들(Patriotic Millionaires)’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부자 증세 캠페인을 펴고 있는 모리스 펄은 총체적 불평등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지적하면서 “쇠스랑이냐 세금이냐를 놓고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세금을 선택한다”고 했다. ‘쇠스랑’은 혁명이나 반란의 상징이다.

CEO들의 자본주의 개혁론은 아직 대세가 아니다. “지난 40년간 자유시장이 훌륭히 작동해왔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부자 증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이 많다. 그러나 좌·우 포퓰리즘의 부상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사회주의 논란과 맞물린 자본주의 개혁론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