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컴 온 베이비, 아메리카(C’mon baby, America)!’

지난해 일본에서 사회현상으로 불릴 만큼 인기를 끈 노래인 아이돌 그룹 다 펌프(DA PUMP)의 ‘USA’ 후렴구다. 중독성 있는 반복적인 후렴구, 유머러스한 안무, 9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황금기를 연상케 하는 스타일이 특징이다. 유튜브 조회 수는 1억8000 만회를 넘어섰다.

1992년 발표된 이탈리아 노래를 리메이크해 붙인 일본어 가사는 미국에 대한 찬양과 동경 일색이다. “수십 년간 관계는 많이 바뀐 듯싶지만/우리는 지구인/같은 배를 탄 여행자” “성공을 위한 동료” “일본에서 함께 경쟁하자”…. 작사가 슌고는 “70년대 미국을 동경하는 소년을 떠올리며 가사를 썼다”고 설명했다. 마스다 사토시(増田聡) 오사카시립대 교수는 아사히신문 칼럼에서 이 노래가 히트한 이유를 미·일 관계에 대한 일본의 불안감에서 찾았다. 북·미 정상회담의 진전, 미국의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 탈퇴 등 통상 압박 등으로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미국을 불러 세우려는 의식이 구현됐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최고 권위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상의 올해 수상작은 총기 사건과 인종차별 등 미국의 사회문제를 통렬히 비판한 미국 래퍼 겸 프로듀서 차일디시 감비노(본명 도널드 글로버)의 ‘디스 이즈 아메리카(This is America)’였다. 미국과 일본 양국의 지난해 최고 인기곡이 모두 미국을 소재로 했지만 그 내용은 극과 극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일본의 미국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5월 25일, 일본을 국빈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머무는 도쿄 마루노우치 팰리스호텔 주변에는 성조기와 일장기가 드리워졌다. 차를 몰고 가다 신호에 멈춰 설 때마다 삼엄한 경비태세가 눈에 띄었다. 라디오에서는 사회자가 트럼프의 방일 일정과 그 의미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일본의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 시대가 시작된 이래 일왕이 초청한 첫 번째 국빈이라는 점도 환영 분위기에 의의를 더했다. 도쿄의 랜드마크인 스카이트리는 성조기를 상징하는 색상으로 밤을 밝혔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트위터에 이 사진을 공유하며 “역사적인 방문을 환영한다”고 적었다. 긴자 거리에는 정치단체의 대형 트레일러가 위세 좋게 줄을 지어 달렸다. 옆면에는 ‘천황이여 지구를 구하소서’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를 구할 지구 혁명의 동지’ 같은 문구를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방일 이튿날인 26일에는 도쿄 료고쿠 국기관(國技館)에서 스모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트럼프와 아베 총리 내외가 참석한 이 대회의 명칭은 ‘미국 대통령배(杯)’였다. 트럼프의 방일에 맞춰 바꾼 명칭이다. 스모는 제사 의식으로 시작된 일본의 천년 국기(國技)다. 국가의 전통을 대표하는 운동경기에 미국 대통령을 건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미국 대통령배 천하장사 씨름대축제’ 같은 느낌이랄까. 스모선수보다도 큰 덩치의 트럼프가 위세 좋게 트로피를 건네며 선수를 격려했고, 아베 총리는 몇 발자국 떨어진 뒤편에 서서 박수를 보냈다.

그러고 보면 1853년 미 해군이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구로후네(黒船·흑선) 사건 당시 일본 막부가 미국인들에게 접대용 유희로 스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스모는 철저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실력지상주의 스포츠다. 입문이 늦은 후배라도 실적을 올리면 까마득한 선배가 고개를 조아린다. 입문자가 적어 몽골 등지에서 선수를 수입해 오면서도 ‘일본인이 우승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일본 사회 괴리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트럼프 방일에 대한 대접은 그야말로 극진했다. 골프를 치고 롯폰기의 인기 선술집 로바다야키(炉端焼き)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로바다야키는 원래 해산물이 주 메뉴이지만 트럼프의 취향에 맞춰 소고기와 감자를 구웠다. 메인이벤트인 일왕과의 접견에서 트럼프는 5월 1일 즉위한 나루히토 일왕의 팔과 등을 토닥였다. 일왕 부부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트럼프 내외가 탄 차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일본 재계도 한몫 거들고 있다. 소프트뱅크와 KDDI, 파나소닉 그리고 소프트뱅크가 인수한 반도체 설계업체 ARM은 트럼프 정부가 연일 공격하고 있는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와의 거래를 중단키로 했다. 여론도 비판보다는 기대감이 크다. 적잖은 비용이 들고 자존심도 상하지만 실리를 챙겨야 한다는 데 무게가 쏠린다.


일본인 트럼프 지지자들이 5월 26일 트럼프의 방문이 예정된 도쿄 료고쿠 국기관(國技館) 인근에서 트럼프의 재선을 기원하는 집회를 진행 중이다. 사진 AFP 연합
일본인 트럼프 지지자들이 5월 26일 트럼프의 방문이 예정된 도쿄 료고쿠 국기관(國技館) 인근에서 트럼프의 재선을 기원하는 집회를 진행 중이다. 사진 AFP 연합
일본을 국빈방문 중인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5월 27일 도쿄 모토아카사카(元赤坂) 영빈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업무 오찬을 갖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도쿄AP·연합뉴스
일본을 국빈방문 중인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5월 27일 도쿄 모토아카사카(元赤坂) 영빈관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업무 오찬을 갖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도쿄AP·연합뉴스

트럼프 한 마디에 정치 생명 달린 아베

이러한 행보를 바라보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굴욕감보다 절실함이 읽힌다. 전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일본 점령기(1945~52년)를 상상하게 하는 저자세 외교의 배경은 명백한 힘의 논리다. 무역협상의 강경한 요구를 억제하고 납북 일본인 문제 해결에도 힘을 빌려야 한다. 쿠릴열도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관계에도 미국의 지지가 필요하고 북미 정상회담에서 소외되며 위축된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도 찾아야 한다.

올여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아베 총리 입장에서는 트럼프의 말 한 마디에 정치 생명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베의 개헌 지지 세력인 일본 우익들은 읍소에 가깝게 트럼프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요청하고 있다. 산케이신문 계열인 석간 후지는 “트럼프가 야스쿠니를 참배하면 역사문제로 일본을 공격해 온 중국과 한국을 침묵시킬 수 있다”고 썼다.

융숭한 대접을 받은 트럼프는 해상자위대의 항공모함에 승선하고, 납북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는 한편 “미·일 동맹은 세계의 안정과 번영의 기초”라며 아베의 체면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미·일 무역 불균형 문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반복했다.

양국이 두드린 계산기가 쉽게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천의 고원’에서 리토르넬로(ritornello)라는 개념을 내놓은 바 있다. 어두운 길을 헤매는 아이가 노래 후렴구를 반복해 부르며 스스로를 달래듯, 인간은 혼돈과 조우하면 내면의 질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미국이여 어서 오라’는 후렴구가 주문처럼 반복되는 이 나라의 역사도 도돌이표를 찍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