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기업 근무, ‘오타쿠 진화론’ 저자

일본에서 회사원으로 일한 지 2년째 되던 어느 날, 기간계약으로 입사한 40대 여성이 부르는 ‘선배’라는 호칭에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설마 나를 부르는 걸까. 또 다른 ‘선배’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본에선 하루라도 빨리 입사한 사람이 선배야.”

전후(戰後) 수십 년,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은 일본 기업의 상식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에서 근속 연수가 쌓임에 따라 동기들과 나란히 승진한다. ‘기업의 별’ 임원직에 오른 극소수를 제외하고 비슷한 임금을 받다 정년을 맞는 일본 샐러리맨의 인생은 관습을 넘어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제임스 아베글렌은 저서 ‘일본의 경영(1958년)’을 통해 일본의 연공서열 제도를 분석했다. 전후 일본의 발전 배경에는 기업을 가족의 연장으로 보는 공동체 의식이 깔려 있다고 봤다. 일괄적으로 신입사원을 채용해 순서대로 직급을, 연차대로 임금을 사이좋게 올려간다.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경력이 쌓이면 자연히 능력도 축적된다는 관점에서다. 일본 사회의 거대한 기반인 ‘와(和)’의 정신이다.

일본의 뿌리 깊은 연공주의에 균열이 가고 있다. 일본의 젊은 인재들이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외국계 기업을 선호하기 시작하면서다. 컨설팅업체 매크로밀이 일본 22~25세 사회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8년 사회초년생의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를 선호하는 사회초년생은 34%, 성과주의 선호는 42%였다. 현 직장 근무 희망기간은 ‘정년까지(40%)’가 가장 많았지만, ‘좋은 조건의 직장이 있으면 전직하고 싶다(39.5%)’와 큰 차이는 없었다.

이에 따라 성과주의로 선회하는 일본 기업이 늘고 있다. 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를 운영하는 패스트리테일링은 2020년부터 입사 3년 차 우수사원에게 최대 3000만엔(약 3억2000만원)의 연봉을 지급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입사 후 3년간 업무 능력을 보인 인재가 해외 근무를 희망하면 평균 연봉(880만엔)의 3배가 넘는 임금을 준다. 임원으로 승진할 기회도 열린다.

일본 3대 ‘메가뱅크’인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은 2020년부터 직급제도를 개편해 인재를 조기 등용한다. 기존에는 입사 25년 차(40대 중후반)에야 지점장급에 오를 수 있었지만, 새 제도하에서는 37세 전후인 15년 차도 지점장이 될 수 있다.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입사 선배’를 추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밖에 소니는 인공지능(AI) 분야 신입사원의 연봉을 최고 22% 인상하기로 했다. 소니 신입사원 연봉은 600만엔 수준이지만 요건에 따라 730만엔까지 지급한다.

야후는 30세 이하 우수 엔지니어에게 초임으로 650만엔을 준다. 히타치, NEC 등 일본의 전통적인 대기업들도 성과주의 도입에 나섰다.

‘아베노믹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올라가지 않던 임금이 연공서열 제도의 균열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후생노동성이 조사한 2018년 일본의 대졸 초임 평균은 월 20만6700엔, 연간으로는 248만엔에 불과했다. 전통적인 일본의 ‘사회초년생=저임금’ 공식은 정년까지 고용의 보장에 대한 암묵적 동의다.

일부 기업들의 젊은 인재 우대는 지금까지의 통념에 비춰보면 파격적인 조치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들, 특히 급성장하는 IT업계와 비교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다.

동영상 공유 기반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틱톡’을 운영하는 중국 바이트댄스의 채용 방침은 ‘무한한 재능에는 무한한 연봉을’이다. 최고의 성과를 보이는 직원은 연간 300만달러(약 32억원)의 임금을 챙긴다.

세상의 변화가 탐탁잖은 것은 일본의 중장년층이다. 사실 금융권을 중심으로 일본 기업에서도 유능한 젊은 직원들에게 고임금을 지급하려는 시도는 적지 않았다.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2011년 발표한 ‘경영노동 정책위원회 보고서’를 통해 일본 특유의 정기 승급제도가 “국제 경쟁의 격화와 장기 디플레이션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시도는 “부장인 나보다 월급이 높은 평사원이 나오는 건 괘씸하다” 같은 반대에 부딪혀 왔다.


일본 도쿄의 회사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일본 도쿄의 회사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연차만 쌓인 고임금 근로자 보호 않겠다

NHK가 지난 5월 방송한 ‘인생 100년 시대, 탈(脫)아저씨를 노려라’는 위기감이 짙어가는 일본의 40대 회사원들을 조명했다. 일본의 전통적인 중후장대 산업과 그 수많은 하청업체들은 지금도 연공서열 체계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올 3월 후지쓰가 발표한 45세 이상 직원 조기퇴직 공고는 ‘연차만 쌓인 고임금 노동자를 더 이상 보호해주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일본의 ‘샐러리맨 오야지(おやじ‧일본어로 아저씨를 가리키는 일종의 별칭)’들은 더 이상 뒷짐을 지고 혀끝을 찰 수 없게 됐다. 치열한 자기계발과 전직으로 젊은 인재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궁극의 개인전이 시작됐다. 생존자가 많을수록 ‘주식회사 일본’의 경쟁력은 커진다. 일본식 연공서열의 적극적인 수입국이었던 한국은 준비가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