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설명 지금 세계는 AI(인공지능) 인재 확보 전쟁 중이다. 하지만 한국은 이 전쟁에서 홀로 뒤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많다. 캐나다 연구소인 엘리먼트AI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톱 AI 인재 2만2400명 중 한국인은 1.8%인 405명에 불과했다. 내년에 문을 여는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 전문대학원이 턱없이 적은 보수 탓에 교수 영입조차 쉽지 않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AI를 국가 미래 전략으로 잡고 매진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상황은 흥미롭다. 물론 기술 도입으로 국가 공공재 범위가 확대돼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다만 AI와 기술 발달이 가져올 미래 사회 변화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사미 마흐로움(Sami Mahroum) 인시아드 혁신정책 총괄, 두바이 퓨처 파운데이션 디렉터, ‘블랙 스완 스타트업’ 저자
사미 마흐로움(Sami Mahroum)
인시아드 혁신정책 총괄, 두바이 퓨처 파운데이션 디렉터, ‘블랙 스완 스타트업’ 저자

토머스 모어 경(卿)이 벨기에 도시 앤트워프의 거리를 거닐다가 ① ‘유토피아’의 영감을 받은 지 500년이 지났다. 지난 5월 인공지능(AI)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벨기에를 방문했을 때 나는 책 속 화자(話者) 라파엘 히슬로디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책에서 히슬로디는 16세기 영국인에게 자신이 보고 온 유토피아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계 최초 AI 장관을 둔 두바이는 미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박물관, 교육 기관, 재단까지 갖추고 있는 나라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가 기술 발전이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아랍에미리트(UAE)는 AI와 자동화에 따른 노동력 절감 가능성에 열광하고 있다.

일단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걸프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안고 있는 심각한 노동 시장 불균형 문제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자국 노동자 비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67% 수준이지만, 아랍에미리트는 11%에 불과하다. 아랍에미리트의 경우 외국인 노동자가 자국민보다 훨씬 많다는 뜻이다. 사막 환경 특성상 인구가 갑자기 더 증가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왔다.

다른 이유는 아랍 사회와 유럽 사회, 두 지역의 깊은 문화적 차이를 들 수 있다. 아랍 사람들이 일을 대하는 태도는 ‘일하기 위해 사는 것’보다는 ‘살기 위해 일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이들은 여가를 즐기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산업 혁명과 ‘(근면 성실을 강조하는)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의 발상지인 유럽과 다른 점이다. 노동에 대한 아랍인들의 태도는 생산성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쥐어짜는’ 경제 시스템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AI와 자동화 시대는 아랍인들의 생활태도와 잘 맞는다.

산업화된 서구 사회에서는 기술 발전이 그동안 사회를 지탱해온 근간, 즉 노동·자본·국가라는 세 가지 축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자본은 기계에 투자했고, 노동자들은 이 기계를 조종하며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했다. 그리고 정부는 세금을 거둬 공공재를 공급하고 필요에 따라 자원을 재분배했다. 이런 구조에 따라 사회 시스템은 점점 복잡해져 갔다.

특히 서구 사회는 기술 혁명이 자본과 ‘나머지’의 ② 격차를 더 벌리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술 발달로 생산성이 올라가고 있지만, 전체 수익에서 노동자의 몫이 감소하는 것이다. 특히 자본뿐만 아니라 여피(yuppie·도시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젊은층), 상속자 같은 계층의 몫이 상당한 수준이다. 저소득자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이런 구조에서 소외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2031 AI 전략을 만들고 미래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2031 AI 전략을 만들고 미래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

반면 아랍은 상황이 다르다. 국가가 천연자원을 국유화하고, 주요 산업을 직접 관리한다. 또 국가는 이 자원을 국제 사회에서 거래하고, 여기에서 나온 잉여 수익을 사회에 분배해왔다. 사실 최근까지는 인구 문제와 천연자원 수입 감소가 아랍 사회를 위협했으나, 상황이 바뀌었다. 기술력을 이용해 여가 사회(여가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사회)에 필수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사회 계약은 붕괴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강화됐다.

그렇다고 AI가 계층 간 격차를 키울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근시안적인 태도다. 선진국들의 실업률이 사상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불만은 일자리 감소보다는 삶의 질 때문에 발생한다. 실제로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는 주유비 인상이 시발점이었고, 영국의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움직임은 EU에 들어가는 자원이 영국을 위해서만 쓰이길 바라는 열망이 반영됐다. 반세계화·반이민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이 움직임들은 일자리 문제가 아니라 범죄나 문화 변화, 삶의 질 문제에 대한 불안감에서 싹튼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많은 여가 생활을 즐기려는 욕구가 점점 양립할 수 없는 요구로 바뀌고 있다. 사람들은 근로 시간을 줄여도 수입이 많아지는 것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정부가 질 좋은 의료, 연금, 교육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지금 대부분의 나라가 정치적 난관에 봉착해 있다.

AI와 데이터 기반 혁신은 이 난제를 풀 열쇠가 될 수 있다. ‘AI 유토피아’에서 정부는 적은 비용으로 공공재나 서비스를 확장할 수 있다. 예산이 부족한 정부의 고민이 해결될 수 있다.

다만 장애물도 있다. 바로 문화다. 1948년 초 독일의 철학자 ③ 요제프 피퍼는 ‘프롤레타리아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가 생활이 모든 문화의 기반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AI 유토피아를 맞기 위해 사람들은 무임승차자에 대한 분노뿐만 아니라 노동 윤리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AI가 주도하는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질서에 따라 국가는 AI와 자동화로 창출되는 잉여금을 국민에게 나눠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부당한 시장 개입이라고 우려할 수 있다. 또 정부가 다양한 상품,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맞춰주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AI와 자동화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국가 소유 생산 시스템은 거의 무제한급 공급 능력을 가질 수 있다.

먼 훗날 미래를 상상해보자. 그때는 이런 이야기가 들릴 수도 있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 정부는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기계를 운용한다. 덕분에 국민은 여가 생활과 창조적이면서도 영적인 일에 자기 시간을 쓸 수 있다. 고용과 세금에 대한 걱정은 옛말이다.” 어떤가. 당신도 이 세계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가.


Tip

16세기 영국 법률가이자 정치인이었던 토머스 모어는 폭력과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세상을 그린 책 ‘유토피아’를 썼다. 책에서 유토피아는 자유와 평등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공정하고 풍요로운 이상 국가다. 그러면서도 모어는 유토피아에서는 아침에 3시간 일하고 점심 먹고 한숨 자고 오후에 3시간 일하면서도 필요한 재화를 충분히 생산한다고 했다. 필자는 AI가 주도하는 세상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이 여가 생활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AI, 로봇공학 같은 기술 발전은 인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노동 효율성을 높여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계가 대체 가능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동시에 지식 기반 경제로 전환하면서 대체 가능한 인력 임금이 떨어지는 반면 대체 불가능한 고급 인력 임금은 상승하면서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독일 철학자 요제프 피퍼는 1952년 ‘레저: 문화의 근본’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는 여가가 나중에 더 일을 잘하기 위해서 갖는 시간, 일의 반대가 아니라 인간성을 유지하기 위한 근본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