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뉴욕 맨해튼 42번가에는 ‘원밴더빌트’라는 이름의 초고층 주상복합빌딩 공사가 진행 중이다. 첨탑을 포함한 전체 높이가 427m로 내년에 완공되면 뉴욕에서 네 번째로 높은 고층 건물이 될 것이다. 국민연금이 지난 2017년 6000억원을 투자해 지분 27.6%를 확보하면서 이 건물의 2대 주주가 됐다. 미국 경제가 계속 순풍을 타면 상당한 투자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도시계획법상 이 부지에는 현재 공사 중인 건물의 절반 규모 건물만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그랜드센트럴 터미널의 공중권(Air Right)을 사들여 용적률이 2배로 늘어난 덕분에 400m가 넘는 마천루 건축이 가능했다. 공중권은 토지나 건물 위의 하늘을 개발할 수 있는 권리로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를 매매할 수 있다. 새 건물을 지을 때 주변에 있는 다른 저층 건물의 공중권을 매입하면 법적으로 허용된 높이보다 더 높게 지을 수 있다.

그랜드센트럴 터미널은 1913년에 준공된 고풍스러운 건축물이다. 화강암과 대리석 외관, 천장 벽화 등 건축적 가치와 함께 역사적 의미가 있는 문화유산이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 교통수단 발달로 열차 수요가 빠르게 감소하면서 철거 위기를 맞았다. 이에 뉴욕 시민이 철거 반대 운동을 벌였고 뉴욕시가 이를 수용했다. 대신 50층 규모의 공중권을 부여해 그 매각 자금을 터미널 유지 보수에 사용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맨해튼 미드타운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메트라이프 빌딩이 터미널의 공중권을 사들여 초고층 빌딩을 세운 첫 사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공중권이 분할 매각됐고, 마지막 남은 공중권이 원밴더빌트 개발사에 넘어갔다.

공중권은 애초 그랜드센트럴 터미널 같은 역사적 건축물 보존을 위해 마련한 제도다. 공중권 거래가 활성화하면서 뉴욕시는 문화유산 보존과 함께 고밀도 도심 개발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전망이 좋은 센트럴파크 주변에 들어서고 있는 날씬하고 높은 ‘슬랜더(slender)’ 빌딩들 역시 공중권 거래를 통해 용적률을 확보한 경우다.

일본도 공공시설 유지 보수에 필요한 재원 확보를 위해 공중권을 활용하고 있다. 도쿄역 복원 공사에 필요한 500억엔을 충당하기 위해 인근 신마루노우치 빌딩과 도쿄 빌딩, 트윈타워 등에 도쿄역의 용적률(공중권)을 매각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공중권은 도심 조망권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부동산 개발업자 시절 뉴욕 소호에 46층 규모의 호텔(현 도미니크 호텔)을 지으면서 주변 건물의 공중권을 모두 사들였다. 호텔을 더 높게 지을 목적이 아니라 호텔에서 도심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뉴욕에서 조망권 확보와 관련해 공중권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맨해튼 첼시 지역에 있는 12층짜리 고급 주택 입주민들이 옆에 있는 낡은 건물의 공중권을 1100만달러에 사들인 것이다. 이 건물 부지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13~14층 높이의 콘도 건축을 막기 위해서였다. 콘도가 들어서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가리는 등 전망이 나빠지기 때문이다. 고급 주택 입주민들이 창밖으로 계속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 상당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낡은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콘도 대신 3~4층 높이의 상업용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국내에선 아직 공중권 거래 제도가 없다. 조망권·일조권을 둘러싼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어 집회·시위나 법적 분쟁이 자주 벌어진다. 좋은 전망을 확보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인식이 약하다. 고밀도 도심 개발을 통해 토지를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저층의 문화유산 소유자들이 재개발을 하지 않고도 개발 이익을 누리는 등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꾀할 수 있는 공중권 제도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