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는 양쯔강의 가마우지 같다. 목줄(일본 부품·소재 산업)에 묶여 물고기(완제품)를 잡아도 곧바로 주인(일본)에게 바치는 구조다.”
일본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는 1989년 ‘한국의 붕괴’에서 핵심 부품과 소재를 일본에 의존하는 탓에 만성적인 대일(對日) 무역수지 적자를 내고 있는 한국 경제를 가마우지 낚시에 비유했다. 어부가 가마우지의 목 아랫부분을 끈이나 갈댓잎으로 묶은 뒤 목에 걸린 물고기를 가로채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고무로의 책은 한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점에 대한 직관적인 설명에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에 경종을 울렸다. 전문가들은 너나없이 ‘가마우지 경제’의 한계를 강조했고, 정부도 부품·소재 국산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성과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대일 무역수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은 일본과 무역에서 240억달러 적자였다. 1965년부터 작년까지 누적 적자액은 6046억달러에 이른다. 한국이 애써 수출해서 번 돈을 일본에 갖다 바치고 있다는 탄식이 나올 만하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가마우지 경제론에 대한 관심이 점점 시들해졌다. 대일 무역역조에 대한 문제 제기가 꾸준히 있었지만 잠시 주목 받는 데 그쳤다. 오히려 가마우지 경제론이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 분업구조를 지나치게 단순하고 왜곡된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인식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삼성전자의 영향이 컸다.
삼성전자는 2000년대 들어 일본 경쟁 업체들을 따돌리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했다.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일본 10대 전기·전자 회사의 영업이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두 배 이상 많을 정도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일본경제신문은 2005년 초 ‘삼성 1조엔 이익의 충격’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일본 경영자들은 삼성의 강력한 리더십과 신속한 결단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핵심 소재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일본 기업에 종속돼 있다고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다. 지배·피지배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종속이론은 삼성전자의 성공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마우지 경제론으로는 세계화가 낳은 상호의존성의 복잡다기한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결국 자연스레 용도 폐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 가마우지 경제론이 다시 살아났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대책을 설명하면서 “가마우지 경제 체제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우리 모두가 합심한다면 그간의 가마우지를 미래의 펠리컨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김 차장과 성 장관의 발언 취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핵심 소재의 일본 의존도를 낮춰야 할 필요성은 분명하다. 글로벌 공급망의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본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가마우지 경제론을 되살린 것은 좋게 보면 실수고, 나쁘게 보면 무지의 결과다. 삼성전자가 흔들리면 일본 소재 업체들뿐만 아니라 소니를 비롯한 경쟁 업체들도 피해를 본다. 더 나아가 세계 전자 회사들이 모두 타격받게 된다. 그게 상호 의존성이다. 핵심 소재의 공급과 수요 관계를 지배·종속 관계로 해석하는, 단순하고 유치한 시각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고 사태 해결에도 도움 되지 않는다.
진단을 잘못하면 엉뚱한 처방이 나오기 십상이다. 부품·소재 국산화와 관련한 대기업 책임론 같은 황당한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시대착오적인 종속이론의 망령이 아직도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