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 양승용
일러스트 : 양승용

1979년 초 신용카드회사인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아멕스)가 교육출판기업 맥그로힐을 상대로 8억8000만달러 규모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했다. 아멕스는 상당한 프리미엄을 붙여 맥그로힐 주식을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주주들에게 유리한 제안이었지만 맥그로힐 이사회는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가 파괴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아멕스는 결국 주식 공개매입을 포기했다.

당시 맥그로힐 편에서 방어전략을 짰던 인물 중에 마틴 립튼이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립튼은 그 경험을 토대로 적대적 인수·합병에 관한 논문을 썼고, ‘포이즌필(poison pill)’이라는 방어수단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는 논문에서 “기업 경영진은 주주의 단기 이익보다 노동자와 고객, 공동체의 장기적인 가치를 더 중시해야 한다”고 했다. 주주(shareholder)만이 아니라 이해관계자(stakeholder)를 모두 배려하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유럽이나 일본에서 이 논문이 나왔다면 전혀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선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월스트리트와 학계 등에서 립튼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투자자와 전문가들은 대부분 “기업은 오로지 주주들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밀턴 프리드먼 이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일부 경영학자들이 ‘이해관계자를 위한 경영’을 주장했지만 소수의견에 그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주주 우선 경영의 타당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1% 대 99%’로 상징되는 불평등 심화와 환경파괴 등 주주 자본주의의 ‘그늘’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반기업·반시장 정서가 확산되는 연쇄 반응이 나타났다.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들 사이에선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당 유력 정치인들이 사회주의적 정책을 주장하고, 젊은 세대가 여기에 호응하는 낯선 현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이대로 가면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기업인들이 적지 않다.

미국 주요 대기업 CEO들의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최근 발표한 성명은 이런 시대변화의 산물이다. 성명은 “고객에 대한 가치 제공, 직원에 대한 투자, 협력업체와 공정하고 윤리적인 거래, 지역 사회에 대한 지원, 장기적인 주주 가치 창출 모두가 기업의 필수적인 목적”이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CEO를 비롯해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애플의 팀 쿡, 제너럴 모터스(GM)의 메리 바라 등 181명의 CEO들이 여기에 서명했다.

BRT가 “회사는 주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오랜 원칙을 폐기한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이에 대해 한편에선 “자유시장에 기반한 자본주의라는 미국의 가치를 흔들고 있다”고 비난하고, 다른 편에선 “고액 연봉을 받는 CEO들이 위선을 떨고 있다”고 꼬집는 등 상반된 반응이 나오고 있다.

세계적인 대기업 CEO들까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아직 승부가 완전히 기운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자 모델은 이론적인 설득력과는 별개로 막상 현실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이해관계자의 정의 또는 범위가 애매한 상태다. 일부에선 경쟁업체까지 이해관계자에 포함시킬 정도로 학설이 구구하다.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서로 다른 입장과 이익을 균형 있게 관리하는 것도 문제다. 자칫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식의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 주주 자본주의의 단순한 원칙에 충실했던 미국이 장기적으로 ‘파이(pie)’를 키우는 능력에서 유럽과 일본을 압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론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김기천 조선비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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