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한 홍익대 기계시스템디자인 공학과, SK브로드밴드 미디어 전략 담당,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플랫폼 전쟁’ 저자
김조한
홍익대 기계시스템디자인 공학과, SK브로드밴드 미디어 전략 담당,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플랫폼 전쟁’ 저자

2004년 9월 22일 미국 ABC방송의 블록버스터 드라마 ‘로스트(Lost)’가 처음 방영한 지 15년이 지났다. J.J. 에이브럼스가 만든 이 드라마는 미국 방송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소위 ‘떡밥(후속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장치를 말하는 속어)’을 계속 뿌려 다음 에피소드를 볼 수밖에 없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이런 방식을 통한 인기몰이는 에이브럼스의 다음 작품인 ‘프린지(Fringe)’에서도 계속됐다. 에피소드마다 내용이 끝나는 기존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 방식을 깼다. 항공기 오셔닉 플라이트 815편의 추락 사고를 그린 이 드라마는 전 세계 시청자가 미국 드라마에 주목하게 했다.

‘로스트’는 블록버스터 TV 드라마를 제작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선 파일럿 방송을 만드는 방식이 바뀌었다. ‘로스트’는 프랑스의 방송 전시회 행사인 MIPTV에 파일럿 방송 두 편이 방영됐다. 이전까지는 파일럿을 한 편만 제작했지만 ‘로스트’는 두 편을 파일럿으로 만들었다. 파일럿 두 편 제작비가 무려 1300만달러(약 160억원)였다. 파일럿 방송부터 많은 제작비를 들여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기존의 드라마 제작비는 편당 30억원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는데, ‘로스트’는 파일럿 방송부터 이런 관행을 깬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경우 시즌 1의 회당 평균 제작비가 200만달러(약 24억원)였다. 결과적으로 이 드라마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첫 에피소드의 시청자가 1865만 명에 달했고 초기부터 이렇게 많은 제작비를 쏟아붓는 것이 트렌드가 됐다. 이후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 때도, HBO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만들 때도 초기부터 많은 제작비를 투입했다.


미국 ABC방송사에서 2004년 방영을 시작한 TV 드라마 ‘로스트(lost)’의 포스터. 사진 ABC
미국 ABC방송사에서 2004년 방영을 시작한 TV 드라마 ‘로스트(lost)’의 포스터. 사진 ABC

극장가 장악한 디즈니도 OTT로 옮겨

하지만 ‘로스트’가 콘텐츠 시장에 제작비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분야는 플랫폼이다. 과거에는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콘텐츠를 TV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로스트’가 흥행한 2005년 미국 극장가의 티켓 판매는 1985년 이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8.7%(1억3000만 장) 감소했다. 극장이라는 플랫폼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2008년 넷플릭스가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이하 OTT)를 내놓으면서 극장의 위기는 점점 빠르게 진행됐다. 콘텐츠가 소비되는 장소가 극장에서 TV나 OTT로 바뀐 것이다.

극장만을 위한 콘텐츠가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콘텐츠 경쟁력을 강화해 극장가를 장악한 곳도 있다. 바로 디즈니다. 디즈니는 극장이라는 플랫폼의 위기가 오자마자 콘텐츠 경쟁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2006년 픽사를 인수했고 이후 마블 스튜디오(2009년), 루카스 필름(2012년)을 연달아 인수했다. 또 지난해에는 21세기 폭스 인수를 발표했다.

이미 전 세계 극장가는 디즈니가 장악한 지 오래다. 디즈니가 올해 개봉한 영화는 단 7편이었지만 극장 관객 점유율은 33.6%였다. 이는 2위를 차지한 워너 브라더스가 개봉한 영화 14편의 관객 점유율(14.4%)보다 두 배 이상 높은 것이다. 워너 브라더스 개봉 편수의 절반으로 두 배 이상의 관객을 모았으니 영화 1편당 벌어들인 수익은 4배가 넘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디즈니도 이제 주요 콘텐츠를 극장 외의 플랫폼을 활용해 제공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디즈니는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대부분의 기대작을 영화관이 아닌 디즈니플러스에 공개할 계획이다. 디즈니플러스는 디즈니가 오는 11월에 출시할 예정인 OTT의 명칭이다. 과거에는 영화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영화를 디즈니, 넷플릭스, 아마존 등 콘텐츠 사업자들이 OTT에서 상영하는 것이다.

OTT와 극장의 콘텐츠 관람 비용을 비교해 봐도 극장의 경쟁력은 크게 떨어진 상태다. 미국 극장의 영화 1회 관람 비용은 13.5달러(약 1만6000원)인데 이는 넷플릭스를 한 달 동안 보는 비용(12.99달러·약 1만5500원)보다 비싸다. 디즈니플러스의 월 구독료 예정치(6.99달러 예정·약 8300원)보다는 두 배 가까이 높다. 비싼 비용을 감수하고 굳이 극장에 가야 할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다.

극장을 위한 콘텐츠는 사라지고 있다. 꼭 극장에 가서 봐야 할 만한 콘텐츠는 이제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극장의 주요 수익원 중 하나였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이제는 미국에서 1억달러(약 1200억원) 이상 흥행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로맨틱 코미디는 극장보다는 아마존이나 넷플릭스 등 OTT 서비스 기업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로 만들어 상영하는 경우가 많다. 또 방송사들은 OTT 서비스와 경쟁하기 위해 ‘로스트’와 같은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디즈니도 넷플릭스와 경쟁하기 위해 극장에서 개봉할 영화들을 디즈니플러스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의 매출이 점점 줄고 있다. 올해 극장에서 개봉된 북미 영화의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0.5%(잠정치)다.

과거 극장은 사람들과 함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2008년 영화 ‘이글아이’에서 주인공 샤이아 러버프는 친구에게 “집에서 영화 보면서 데이트하지 말고, 극장과 진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미 많은 사람이 극장보다는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극장이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조차도 더 이상 극장만을 위한 콘텐츠가 아닌 게 플랫폼 시장의 현실이다.

김조한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 브랜드사업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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