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미국 헤지펀드 DPT 캐피털 공동 창업자
김우창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SSCI 학술지 ‘Quantitative Finance’ 편집장, 미국 헤지펀드 DPT 캐피털 공동 창업자

46.1%. 2017년 기준 우리나라의 상대적 노인빈곤율(소득이 중위소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노인 비중)이다. 은퇴자 두 명 중 한 명은 빈곤층이라는 의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악이다. OECD 평균이 10% 초반임을 감안하면 우리의 노후 빈곤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노후 빈곤 문제는 우리 국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 할 수 있다.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의 추세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 사회는 유례없는 경제적 성공을 이뤄낸 바 있다. ‘한강의 기적’은 이미 진부한 표현이 됐다. 우리는 전 세계에 7개국밖에 없는 30-50클럽(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 이상이면서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인 국가)에 가입한 나라 아닌가.

그런데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한참 뒤처진 국가들 상당수가 한 자릿수 노인빈곤율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노후 빈곤은 사회 전체의 부(富)가 모자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은퇴 후 빈곤해지는가.

OECD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사회 노후 빈곤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2013년 기준 OECD 가입국의 평균 노인빈곤율은 12%다. 하지만 연금 소득을 제외하고 다시 노인빈곤율을 측정하면 70%로 올라가게 된다. 연금 소득 때문에 빈곤층에서 벗어나는 인구가 58%나 된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년 기준 노인빈곤율이 49.6%인데, 연금 소득을 제외한 노인빈곤율은 61%였다. 연금 소득 때문에 빈곤에서 벗어난 은퇴인구가 11%밖에 되지 않는다. 58% 대 11%. 이것이 우리 사회가 심각한 노후 빈곤 문제를 겪고 있는 이유다. 노후 빈곤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연금제도의 미성숙 때문이다.

우리의 노후 빈곤은 시간이 지나면 연금제도의 성숙과 함께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다. 국민연금은 1999년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됐고, 퇴직연금은 2005년에 도입됐다. 따라서 그 이후 경제활동을 시작한 세대가 은퇴하는 시점, 즉 2040년 이후 은퇴자는 더 이상 ‘용돈연금’이 아닌 의미 있는 수준의 연금 급여를 받게 된다. 노후 빈곤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의 지속가능성 확보와 함께 퇴직연금과 개인연금, 즉 사적 연금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사적 연금시장은 전혀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10월 8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정무위원회 소속 제윤경 의원(더불어민주당)은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년간 생명‧손해보험사의 연금보험과 연금저축 상품 총 1028개 가운데 57%인 594개의 상품이 마이너스 수익률을 냈다고 밝혔다.

또 10월 17일 고용노동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한정애 의원(더불어민주당)은 퇴직연금 사업자 43곳이 지난해 거둔 퇴직연금 사업 수수료 총액이 9000억원(적립금 총액의 0.5%)에 육박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익률은 연 1.01%였고 전체 적립금 규모는 190조원이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1조9000억원의 수익만을 고객에게 주면서 그 절반에 육박하는 금액(9000억원)을 수수료로 챙긴 셈이다.

2018년 기준금리가 연 1.5~1.75%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은행 이자보다 못한 수익을 주면서 수수료만 받아 간 것이다. 2018년의 물가상승률이 1.5%였으니 퇴직연금 가입자의 실질평균수익은 마이너스인 셈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한다면 앞으로도 노후 빈곤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장지연(오른쪽) 국회 연금특위 위원장이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제5차 국민연금 개혁과 노후소득보장특별위원회(연금특위) 전체회의를 마친 뒤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장지연(오른쪽) 국회 연금특위 위원장이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제5차 국민연금 개혁과 노후소득보장특별위원회(연금특위) 전체회의를 마친 뒤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사적 연금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현재 연금 사업 수수료 구조가 연금 사업자(금융회사)들이 굳이 고객의 수익을 올리려는 노력을 할 유인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에서 수익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은 연금 사업자가 수익에 비례하는 성과보수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새로운 상품이 판매될 때 받는 판매수수료 그리고 연금계좌 내의 총금액과 운용 기간에 비례하는 운용 수수료만 연금 사업자가 받을 수 있다.

운용 수수료는 운용 기간에 따라 고정된 비율로 받는다. 수익률이 마이너스이든 플러스이든 일정액을 가져간다. 연금 사업자 입장에서는 굳이 고객을 설득해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투자에 적극 나설 이유가 없는 셈이다. 자신이 받는 수수료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적 연금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경쟁이 없기 때문이다. 연금 사업자는 법에 의해 은행, 증권사, 보험회사만으로 정해져 있다. 미국과는 다르게 연금에 특화된 혁신기업이 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는 구조다.

게다가 대부분의 금융소비자는 연금 상품의 특성상 주거래은행, 즉 월급통장이 개설된 곳과 거래하고 있다. 월급이 들어오는 주거래은행에서 한 번에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것이 손쉽기 때문이다.

은행들 입장에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와 같은 사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고객은 들어오고, 들어온 고객은 나가지 않으며, 새로운 경쟁자의 진입조차 법에 의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다. 기존 연금 사업자들은 고객을 위해 더욱 나은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줄 이유가 없다.

결국 사적 연금시장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연금 사업자가 수익률을 높이는 것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고객이 부자가 되면 연금 사업자도 돈을 벌게 하라. 그리고 경쟁을 허하라.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사적 연금시장은 정상화할 수 없다. 정부 고위관료가 연금 사업자에 연금 상품 수익률을 올리라고 종용하는 것으로는 효과를 얻기 힘들다.

연금 사업자 역시 변화할 필요가 있다. 퇴직연금은 모든 임금 노동자가 강제적으로 세전 소득의 13분의 1, 즉 8.33%를 납입하게 된다.

개인연금은 선택적으로 가입할 수 있는데 연말 정산 시 700만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다. 다른 금융 분야와는 다르게 사적 연금시장은 법과 세제 혜택에 의해 생긴 것이다. 연금 사업자들이 열심히 뛰어서 생긴 시장이 아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연금 사업자들이 챙긴 1조원에 가까운 수수료는 국민의 혈세인 셈이다. 규제와 제도의 변화가 선행돼야 하겠지만, 연금 사업자들 역시 연금을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 연금은 금융 상품이 아닌 노후 보장을 위한 사회보장 시스템이다.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인 교육 서비스를 국가가 다 제공할 수 없기에 사립학교가 존재하는 것처럼, 연금 사업자는 국가를 대신해 국민의 노후 보장을 책임지는 사회보장 시스템의 일부임을 명심해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