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성장추세가 하락하고 있는데도 이를 멈추게 하거나 역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부산항 컨테이너 터미널.
한국 경제의 성장추세가 하락하고 있는데도 이를 멈추게 하거나 역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은 부산항 컨테이너 터미널.

‘히스테리시스(hysteresis·이력현상)’란 물리학에서 어떤 형체에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이 가해졌을 때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에서는 특정 경제 사건이 그 이후에도 지속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의미한다. 필자가 공부할 때 교수님은 “깡통이 한 번 찌그러지면 두 번 다시 원상을 회복할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이 히스테리시스다”라는 말로 이 용어를 눈앞에 보이듯 가르쳐 주셨다.

국내 경제에 확실한 히스테리시스 효과를 남긴 사건은 1997년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1990년대 초반까지 8% 이상을 유지하던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외환위기 이후 4%대로 하락했다. 그야말로 반 토막이 났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우리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이 사건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3%대 중반으로 하락했다.

그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이전의 성장률을 회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히스테리시스 효과가 경제에 구조적인 변화를 야기했음을 의미한다. 1997년 외환위기는 그때까지 행해지던 기업의 부채 경영 관행과 과잉 생산 경향을 차단하는 구조조정을 가져왔다. ‘대마불사’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던 도덕적 해이와 묻지마 투자는 이후 사라졌지만, 성장 동력은 약화했다. 회복과정에서 도입된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편은 비정규직을 확대했고, 장기적인 노동 시장 불안을 낳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의 부동산 대출제도인 모기지론이 부실화되면서 세계의 금융 시스템이 마비된 것이 원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금융 안정성 강화와 소비자 보호에 대한 요구가 세계적으로 제기됐다.

위기 발발에도 국가 지원으로 손해보지 않고 사는 기업가와 금융 투자자들에 대한 분노가 사회적으로 번져 나가면서 미국 월가를 점령하는 시위까지 발생했다. 그 결과 미국의 ‘도드-프랭크 법(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금융 개혁 법안)’ 도입과 같은 금융시장 리스크를 제어하기 위한 제도가 도입됐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자기 자본 기준도 더욱 강화됐다. 이러한 구조적인 변화는 글로벌 경제의 안정성을 강화했지만, 성장의 역동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올해 들어 국내 경제의 성장이 예상보다 훨씬 위축되고 있다. 연초 예상했던 2.7% 성장은 고사하고 2% 성장을 달성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내년에는 2.2% 성장을 전망하지만, 이 역시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밑도는 수준이다. 한국 경제는 성장추세가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기적으로도 하락 국면에 들어 있다.

다 알고 있는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이유는 성장추세를 하루빨리 역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장기추세가 하락하고 있는데도 이를 멈추게 하거나 역전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잠재 성장률 하락의 주요 원인인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는 이미 정해진 현실이다. 그런데 자본 축적마저 저하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성장을 견인하기 위한 신성장 산업을 찾아야 한다면서도 규제 장벽은 여전히 높다. 온 나라가 부동산 투자로 지대추구에만 매달리고 있다.

성장률이 1% 증가하면 실업률이 0.1% 하락하고 고용률은 0.18% 증가한다. 경제가 성장해야 일자리도 늘고 생활도 좋아진다. 저성장 기조를 빨리 멈추게 해야 한다. 저성장이 또 다른 히스테리시스 효과를 남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