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성의 원칙(subsidiarity principle)은 유럽연합(EU)의 통합과정에서 적용하고 있는 법 제도상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다. 보충성의 원칙이란 소단위의 법률이나 제도가 우선하고 소단위의 책임 범위를 넘어서는 단계에서 차상위의 제도가 적용돼야 한다는 법률용어다. 이 원칙은 EU 통합과정에서 각국에서 자국 제도를 우선 적용하고 그 범위를 벗어난 단계에서 EU법을 적용한다는 원칙을 수용함으로써 개별국의 자치 범위를 최대한 존중하게 했다.

보충성의 원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유럽에서 나타난 현상은 각 국가 간 제도적 경쟁이다. 더 우수한 제도를 가진 국가가 유럽 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경우에서 나타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의 맥주에 관한 법 제도인 ‘라인하이츠게보트(맥주순수령)’다. 국내 텔레비전 광고에도 등장해서 유명해진 이 제도는 맥주를 생산할 때에는 물, 맥아, 홉 외에는 사용하지 못한다는 규정이다. 1516년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도입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됐다.

그런데 EU 통합과정에서 독일이 이 제도를 근거로 다른 나라 맥주를 규제하려 들자 주변국들이 유럽사법재판소에 제소해 이 규정의 폐지를 권고받기도 했다. 보충성의 원칙 때문에 규정은 유지하되 독일이 다른 나라 맥주 규정도 인정해 자국 시장에서의 판매를 허용해야 했다. 라인하이츠게보트는 1993년 독일 맥주법이라는 이름으로 개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 기본골격은 유지되고 있다. 독일 맥주의 질적 수준을 보장하는 이 법 제도는 독일 맥주의 세계적 경쟁력을 만든 근간이 됐다.


독일의 마이스터제도는 자국 기능인력의 경쟁력을 보장하는 중요한 인프라다.
독일의 마이스터제도는 자국 기능인력의 경쟁력을 보장하는 중요한 인프라다.

서비스의 제도화 사례도 있다. 독일의 마이스터제도가 그것이다. 마이스터제도는 독일의 직업교육제도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중등교육과정부터 직업학교의 양성과정이 시작된다. 초기에는 이론만 배우다가 점차 실습 시간이 증가한다. 양성교육은 교육부가 관리하지만, 실무에 투입돼 훈련받는 과정은 해당 직업의 직능단체에서 결정한다.

직업학교의 양성교육을 다 마치고 이론과 실무능력에 대한 졸업시험을 통과하면 기능사에 해당하는 ‘게젤레’가 된다. 이후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주어진 기간에 이론교육을 받고 실무경력을 쌓은 후 마이스터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 마이스터가 되면 자기 사업장을 열 수 있는 자격과 기능사를 교육할 수 있는 권한이 함께 주어진다. 그래서 기본적인 경제학, 법학, 교육학 등도 시험과목에 포함된다.

지방별로 혹은 직종별로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마이스터가 되는 나이는 보통 30대가 돼야 할 정도로 전문인 양성 교육과정이 정교하게 구성돼 있다. 이 제도는 독일 기능인력의 경쟁력을 보장하는 중요한 인프라다.

우리나라도 제도화를 추진해야 할 분야가 있다. 상품으로는 김치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본과 중국에서 생산되는 김치와의 차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 면에서는 한류가 대상이 될 수 있다. 움직이는 기업이라고 불리는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한 한류 스타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적어도 5년 이상의 전문화 과정에서 이론과 실무를 배우고 내부점검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는 제도화를 통해 상품이나 인력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글로벌화한 세계에서 자본과 사람은 좋은 제도가 있는 곳으로 다 움직인다. 지금은 제도적 경쟁의 시대다. 국가의 경쟁력은 제도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