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는 국내 거대 기업에 구조조정을 가했다. 정부가 주도한 수많은 재벌과 기업 구조조정은 비상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후유증도 많았다. 최근 들어 조선, 자동차 등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기간 산업이 부실화하면서 공적자금에 의한 구조조정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덮치면서 다시 악몽 같은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나오고 있다.

정부 주도 구조조정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 중 하나가 대우조선해양이다. 대우조선해양이 산업은행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은 IMF 외환위기로 인한 대우그룹의 해체에서 비롯됐다.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한 이 회사를 지배한 산업은행은 22년이 되도록 새로운 주인을 찾아 주지 못했고, 기업의 부실화에 대한 회생 자구 노력이나 혁신을 유도하지 못한 채로 끌려다녔다. 최근에는 또다시 막대한 국민 부담이 필요한 공적자금 투입을 전제로 한 현대중공업으로의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의심스러운 회계로 부실을 숨겨왔고 이를 감시할 산업은행은 아무런 구조조정을 유도하지 못한 채로 기업의 부실화를 방관해 왔다. 숨겨진 부실이 대규모로 드러나고 기업의 부실화가 분명해진 이후에 취임한 최고경영자가 인력 감축 등의 고통스러운 선택을 주저할 때도 산업은행은 아무런 압력을 가하지 못한 채로 묵인했다. 당연히 기업 부실화에 대한 책임은 전문경영인과 더불어 지주회사인 산업은행에 물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부실 지주회사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이 바로 국내 공적자금의 속성이다.


정치적 판단 우선시하는 공적자금

한국GM의 공적자금 투입 사례만 봐도 한국GM이 장기적으로 회생해 한국 경제에 기여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해직 노동자 복직을 대통령이 부탁했던 인도의 마힌드라그룹이 지배하는 쌍용차도 이제 공적자금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탈원전 정책으로 부실화한 두산중공업에도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매출이 유실된 항공 산업도 융자 지원만으로 감당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사태로 얼마나 많은 기업이 공적자금에 기대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는 불확실성으로 우리 경제는 빠져들고 있다.

물론 위기 시 양적 완화에 의한 산업 구조조정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대규모로 이뤄졌다. 대표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중에 버락 오바마 정부는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형태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회생시켰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커다란 내수 시장에 기반한 기업들이고, 유가 상승으로 인한 자동차 수요 감소와 수입차들과 경쟁에서 비롯된 위기였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들은 내수 시장의 수요만으로 회복하기에는 훨씬 커다란 글로벌 위험에 노출돼 있다. 우리 정부와 형식적인 주주인 산업은행은 공적자금 투입만으로 과연 부실화를 감당할 수 있을지를 우선 판단해야 한다.

기업이 부실화하면 경영진과 채권단은 기업의 잔존 가치가 청산 가치보다 크다는 명백한 판단이 있어야 추가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언제나 민간 금융이 아닌 공적자금은 정치적 판단을 우선한다.

글로벌 경제에서 한 국가의 산업 경쟁력은 변동되는 것이 다반사다. 이때마다 한국은 대기업의 부실은 모두 공적자금으로 막고 책임을 지지 않는 관치금융이 반복되고 있다. 관치금융의 고리를 어떻게 끊고 공적자금의 도덕적 해이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어떻게 지불하게 할지를 논의해야 한다. 글로벌 경제의 변동성이 급증하고 중국이라는 벅찬 경쟁 상대가 지척에 버티고 있는 현실에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자는 편법으로는 우리 경제 전반의 부실화를 예방할 수 없다.

공적자금은 다 미래 세대의 돈이다. 그 미래 세대를 외면한 정부 주도의 관치를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민간 금융이 경제 파수꾼이 될 수 있도록 금융 선진화의 근본 대책을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몰려오는 산업 부실의 먹구름이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