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혁신의 대가인 미국 다트머스 경영대의 라구람 라잔 석좌 교수와 크리스 트렘블 교수는 기업들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 개의 박스’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 개의 박스는 현재 집중해야 하는 핵심 사업이 담긴 박스, 미래를 대비하는 실험적 요소가 담긴 박스 그리고 반드시 잊어야 할 과거가 담긴 박스다.

경영자들은 핵심 사업을 잘 관리하고 미래를 사전에 준비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트머스대 교수들이 조언한, 과거를 잊는 지혜란 경영 환경이 급변했을 때 기업의 위치를 정확히 재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많은 기업이 전환기에 잊어야 할 과거를 잊지 못한 탓에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일본의 소니는 세상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될 때도 과거의 영광을 선사했던 제품 내구성을 최고의 가치로 뒀다가 삼성과의 속도전에서 밀렸다. 핀란드의 노키아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피처폰의 경쟁력은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관련 기술 개발에 시간을 허비하다 망했다.

이처럼 경영 환경이 급변했을 때 일부 기업은 과거의 승리 공식을 고집하다 실패하고, 일부 기업은 냉정한 현실 판단을 통해 성공한다. 위기 시 최고경영자(CEO)의 판단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가 현재 진행형이다. 이 위기가 얼마나 깊고 오래 갈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각국이 공급한 전대미문의 천문학적 유동성이 앞으로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하다.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 이후의 경제를 ‘90% 경제’라고 칭했다. 이는 광범위한 산업 영역에서 한계 기업들이 무더기로 퇴출당한다는 뜻이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은 가장 큰 중국 시장에서 퇴출당했고 한국의 자동차 또한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다. 전기자동차, 자율주행자동차, 차량공유 서비스, 유인 드론 등 산업의 지각변동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런 변혁의 어떠한 영역에서도 우리 기업은 주도적으로 변화를 이끌지 못하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 정치권

더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 사회와 정치권에 퍼진 거의 종교에 가까운 과거에 대한 집착이다. 정치권은 포퓰리즘 복지정책, 규제 일변도의 주택정책, ‘경제 민주화’의 일관된 메시지를 내며 한국 경제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으로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재벌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한국 사회 문제의 뿌리를 재벌의 경제력 집중에서 찾는 것이다.

과거 한국 사회와 정치권의 도그마(독단) 중에는 재벌 원죄론이 있고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의료 민영화 불가의 원칙 등이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알리바바, 테슬라 등 기술 혁신 대기업이 모두 창업자의 차등의결권 행사를 통한 이른바 황제경영으로 급성장하는데 한국은 아직도 재벌의 황제경영을 탓하고 있고, 알리바바, 아마존, 이베이 등이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 종합금융회사로 급성장하고 있는데 한국은 여전히 금산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과거의 도그마를 해체하지 못하니 원격의료도 안 되고, 인터넷 은행도 안 되고, 금융시장에 의한 경제의 자율적 혁신과 순환도 안 된다. 새로운 것을 배우지 못하는 한국은 이미 경제적 자폐 증세가 심각하다. 그 자폐 증세의 원인에는 수년 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일갈했다는 ‘삼류도 못 되는 오류들이 일류나 이류를 통제하고 충고하려는 오만’이 존재한다.

과거의 도그마를 청산하지 못한 채로 진행되는 한국형 뉴딜은 대부분 재원 낭비로 귀결될 것이다. 시장이 없는 투자처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전환기에는 기업이든 사회든 과거를 잊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치권의 재벌과 부동산에 대한 집착은 미련하다. 지금의 재벌들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존재들이다. 부동산 또한 글로벌 통화정책의 영향이 크다. 변화를 읽지 못하는 과거의 도그마적 원죄론은 종교의 영역에만 있어야 한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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