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침체에 빠져 고민하는 황제 앞에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나타났다. 그들은 땅속의 보물을 담보로 지폐를 찍어 공급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황제의 귀에 속삭인다. 황제는 이 정책에 서명했고 돈이 풀려나가면서 경제는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나 돈이 너무 많이 공급되면서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하자 경제는 더 큰 침체로 빠져든다. 황제는 그제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속삭임에 넘어가 종이를 화폐라고 사기행각을 벌인 것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다.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나오는 장면이다.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Bundesbank)의 총재 옌스 바이드만(Jens Weidmann)은 2012년 통화량 확대 정책을 추진하던 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를 비판하면서 ‘파우스트’의 이 장면을 인용했다. 그 이후 통화량 확대 정책을 반대하는 학자들은 곧잘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현대통화이론(MMT)의 주창자들은 국가가 화폐의 가치를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과도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만 초래하지 않는다면 화폐 발행을 늘려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은행이 통화를 증발해 대규모 국채를 사들였지만, 물가 안정을 해치지 않고 성장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올해 들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거의 모든 나라가 경제 침체를 겪고 있다. 경제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정책수단은 확대금융 정책이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시작한 2월부터 5월까지 한국의 시중 통화량 증가액은 월평균 30조원이 넘는다. 1월의 19조5000억원에 비하면 50% 이상 증가한 것이다. 광의의 통화량(M2)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9% 증가했다.
그러나 소비자물가는 0% 증가해 아무런 변동을 보이지 않았다. 생산자 물가지수는 같은 기간에 오히려 0.9% 하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3.3%, 전년 동기 대비 -2.9%를 기록했다. 아직 과도한 인플레이션 조짐은 보이지 않고 경기 부양 수요는 여전하기 때문에 한국은행의 완화적 통화 정책 기조는 그대로 유지될 전망이다.
통화량 확대의 문제는 자산 가격 급등
문제는 자산 가격 급등이다. 중앙은행의 완화적 기조 외에도 금융혁신과 새로운 금융기법의 도입으로 민간의 신용공급 여력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내로라하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금융산업에 진출하면서 더 쉽게 신용이 창출되고 공급되는 것이 글로벌한 현상이 됐다. 금융기관이 공급하는 신용 창출의 반대편에는 필연적으로 부채증가가 존재한다.
한국은 2019년 말 GDP 대비 민간부채가 197.6%를 기록했다. 올해 들어 GDP는 감소하고 신용 규모는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부채 비율은 더 급속히 증가할 전망이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올해 1분기에 민간신용 비율은 201.1%를 기록했다. 유동성 증가로 늘어난 민간부채의 상당 규모는 부동산을 매입하는 데 사용됐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금융이 발달한 선진국에서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부동산은 공급의 유연성이 낮아서 가격상승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초과이익에 대한 기대는 과다부채와 과도한 자산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버블을 형성한다. 더는 버블이 커질 수 없게 되면 먼저 매도하려는 심리 때문에 급격한 자산 가격 하락을 초래한다. 이때 자산 가격은 폭락하지만, 부채는 그대로 남아 과잉부채가 되고 중산층의 붕괴와 경기침체를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간 셈이다.
통화팽창이 악마의 속삭임이 되지 않으려면 금융기관의 신용 확대를 통제하는 제어장치가 있어야 한다. 렌트 확대와 버블 위험이 심화하지 않도록 부동산금융은 다른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신용공급에 대한 기본적인 리스크는 금융기관이 스스로 책임지도록 요구해야 과도한 신용 확대를 막을 수 있다. 이제는 통화공급의 확대만이 아니라 통화 정책이 합목적적으로 작동하도록 미세조정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