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외국어대 졸업, 전 한화 갤러리아 상품총괄본부 기획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국이 어수선했음에도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마케팅 비용을 줄였지만, 생각보다 판매가 감소하지 않았고 내년 전망도 나쁘지 않다. 넘쳐나는 유동성을 거둬들이기 위한 각국의 출구 정책이 시작되기 전까지, 기업들은 이제 또 다른 기회를 찾는 데 몰두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시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인수·합병(M&A)이다.
이미 미국의 팹리스(반도체 설계·개발 회사) 기업들을 중심으로 큰 규모의 M&A가 이뤄졌다. 반독점 심사 같은 후속 절차들이 남아있지만, 엔비디아는 부족한 중앙처리장치(CPU) 역량을 채웠고, AMD는 사업 포트폴리오에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를 추가하게 됐다. 각기 비어 있던 마지막 퍼즐을 맞춘 엔비디아와 AMD는 이제 매출이 10배 가까이 되는 인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최고 기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인텔의 메모리 사업부를 인수한 SK하이닉스를 제외하면 한국 기업들은 아직 대단한 움직임이 없다. 현금 보유액이 충분한 기업들이 몇몇 있지만 인수 루머가 들려오지 않는다. 물론 시장이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에 무리해서 투자할 시기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기회는 불확실성 속에서 찾아오고 불확실성 속에서 결단을 내린 경쟁자들은 이미 더 위협적인 모습으로 진화했다. 전세를 살던 이와 무리해서라도 집을 산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 IT 시장에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M&A를 강행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등장하고 있다.

시스템·화합물 반도체 역량 아쉽다
현재 시점에서 한국 기업들이 가장 부족한 분야는 시스템 반도체와 화합물 반도체를 꼽을 수 있다. 두 단어 모두 클라우드, 5세대 이동통신(5G), 전기차, 자율주행과 같은 IT 시장의 미래가 담긴 기술을 관통하는 핵심 역량이다. 시스템 반도체와 관련해서는 삼성전자와 실리콘웍스가 분전하고 있고, 최근에는 SK텔레콤의 인공지능(AI) 반도체가 등장해 기대감을 높이고 있지만, 선두 기업들과 경쟁력을 얘기하기는 다소 부족한 상황이다.
화합물 반도체 시장은 더 심각하다. 실리콘 반도체가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의 고온과 고전압 또는 고주파수에서 작동할 수 있는 화합물 반도체는 과거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역량을 내재화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5G와 전기차 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며 이제는 미래 반도체 시장을 이끌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해당 시장을 미국과 일본, 유럽 기업들이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의 경우 이렇다 할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힘들다. 비어 있는 퍼즐을 가장 빠르게 맞출 수 있는 방법은 M&A를 통해 관련 역량을 내재화하는 것이다. 몇 분기 만에 벌어진 기술(테크놀로지) 기업들의 시가 총액 인플레이션을 염두에 두면, 늦을수록 손해인 것 같은 조바심이 든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한국 기업의 경우 현금 보유액이나 규모 측면에서 충분한 인수 여력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신중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M&A를 선택하기 전 반드시 살펴보고 갈 만한 이야기가 있다.

특정 기술에 매몰된 M&A는 경계해야
스마트폰 시장 개화기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IT 시장의 유력 기업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스마트폰 관련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운영체제(OS) 개발에 뛰어들었고, 이후에는 AP(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칩) 설계에 나섰으며 각자 부족한 퍼즐을 맞추기 위한 M&A에 자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시장엔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패배한 이들이 OS와 AP를 위해 쏟아부었던 자금과 역량은 고스란히 매몰됐다. 승자 승 원칙이 강하게 지켜지는 반도체 시장, 특정 기술에 묻혀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반도체 시장의 작동 원리인 고도의 분업 체제에 대해 살펴볼 필요도 있다. 전통의 반도체 왕국 인텔이 AMD와 엔비디아에 밀려 고전하는 최근의 모습은 반도체 시장의 분업 체계에 순응한 전략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 최신공정을 가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에 생산을 맡기고 설계에 집중한 팹리스 기업들은 그들보다 매출이 열 배는 족히 넘는 인텔을 몰아붙이고 있다. 그럴듯한 수십 가지 재주보다는 남들보다 앞선 단 한 가지의 역량이 더 중요한 것이다.
반도체 시장의 승자 승 원칙과 분업의 작동원리가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특정 기술에 매몰돼 M&A를 진행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미 다 알 만큼 유망한 기술을 두고서도 아직 이에 대한 역량이 없다면 해당 기술은 이미 늦은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남으면 반드시 더 큰 기회가 열린다
시스템 반도체는 이미 늦었으니 한국 기업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식의 허망한 결론을 짓고자 함은 아니다. 단지 시기와 방향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특정 기술에 매몰돼 맛있어 보이는 떡을 우리도 한입 베어 물어보자는 심정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을 다른 이에게 빼앗기면 한국 기업이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반도체 시장의 지난 이야기가 주는 두 번째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고도의 분업 구조에서 승자가 되는 것은 개별 시장, 개별 기업이 아닌 가장 경쟁력 있는 분업 구조를 만들어낸 진영이다.
가장 유망한 영역이 아닌 한국 기업이 가장 잘하는 영역에서 전장을 만들고 가장 강력한 진영에 속할 수 있도록 진영을 구축하는 데에 힘을 써야 한다. 투자 여력이 있다면 지금 당장은 부족한 퍼즐을 모으는 것보다는 우리가 가진 퍼즐이 최후에 선택될 수 있도록 지금 가진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에 써야 한다. 단지 더 많은 퍼즐을 가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퍼즐을 선택하고 완성하는 것은 결국 시장이기 때문이다.
이미 시장은 패러다임 전환기에 도달했고 지금은 한국 기업들이 가진 것을 들고 생존을 고민해야 할 때다.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고 싶다면 우선 살아남으면 된다. 비어 있는 역량을 채울 수 있는 최적의 기회는 그때쯤 찾아온다. 대략적인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고, 섣불리 투자한 금액들이 매몰되는 순간, 기다린 회사에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꼭 필요한 역량을 얻을 기회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