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U(중앙처리장치) 시장에서는 AMD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모바일 시장에서는 애플이라는 핵심 수요처를 잃은 인텔. 인텔은 이제 자신들의 핵심 사업 영역인 서버, 클라우드 시장에서도 경쟁자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서버, 클라우드 시장에서 오랜 경쟁자인 AMD는 가격경쟁력을 넘어 성능 우위를 내세우기 시작했고, 암(ARM)은 압도적인 전력 소비효율을 무기로 인텔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인텔 입장에서 당혹스러운 점은 새롭게 시장에 등장하고 있는 ARM 진영의 기업들이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현재 서버용 시장에서 인텔의 핵심 수요자들이란 것이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오늘날 인텔 데이터센터 그룹의 매출을 책임져주는 핵심 수요자들이 모두 각자의 로직 반도체 내재화 계획, 이른바 ‘탈인텔’ 계획을 세웠다.
아마존에는 독자 프로세서인 그라비톤과 연산 가속기 트레이니엄이 있고, 구글은 자사의 AI(인공지능) 반도체 TPU(텐서프로세서유닛)가 있다. MS마저 애저용 ARM 기반 독자 프로세서 개발에 나서며, 인텔의 데이터센터 비전은 날이 갈수록 불확실해져만 가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쟁자인 AMD는 물론, 신규 플레이어 진입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던 로직 반도체 시장에 변화가 찾아온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인텔의 공정(工程) 경쟁력 하락이다. 인텔의 공정이 순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들에 두 세대 이상 밀리게 된 시점부터, IT 기업들은 ‘설계에 집중하면 인텔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PC 시장에서 AMD가 이를 증명했고, 모바일 시장에서는 애플이 이를 증명했다. 만약 인텔의 대단한 반전 카드가 나오지 않는 이상 데이터센터 시장에도 인텔의 독주 체제를 무너뜨릴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모바일로의 패러다임 전환, 인텔에 불리
공정 기술의 발전은 연구·개발(R&D)이 이끄는 것이 맞지만, 제조업 관점에서 그 과정을 이어가게 하는 핵심은 바로 물량이다. 자사 물량에만 의존하는 인텔은 자유롭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 기업들의 물량을 수주하는 순수 파운드리와 물량 싸움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바일 시대로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되며 인텔이 지배하고 있던 기성 데스크톱 시장보다 더 큰 모바일 시장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엄청난 수요가 순수 파운드리들로 흘러 들어가며 어느 순간 인텔의 물량을 완벽히 압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인텔 역시 이 같은 정세 변화에 대항하기 위해 역대급 투자를 집행해 10나노 공정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7나노 공정을 동시에 준비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섰지만 이미 운명은 완벽히 갈린 듯한 모습이다. 인텔의 7나노 공정은 다시 6개월여 연기돼 2022년으로 밀렸고, 그때 즈음이면 파운드리들은 무려 3나노 양산에 근접하게 될 것이다. 체감되는 공정 격차는 지금보다 더 벌어질 수 있다.
팹라이트로의 전환, 인텔의 반전 카드
위기에 몰린 인텔은 결국 파운드리들에 손을 내밀었다. 이미 인텔의 그래픽칩셋 일부가 대만의 파운드리 기업 TSMC에서 생산이 되고 있고, 최후의 보루처럼 여겨지던 메인스트림 CPU까지 외주를 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설계만 하는 팹리스 기업, 생산만 하는 파운드리 기업과 다르게 설계와 생산을 모두 할 수 있어서 더 강력해보였던 인텔이 결국 생산의 일부를 파운드리에 맡기며 팹라이트로의 전환에 나선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 이야기를 마치 궁지에 몰린 인텔의 패배 선언처럼 그리기도 하지만 팹라이트로의 전환 결정이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인텔의 반전 카드가 될 수 있다.
파운드리의 선단 공정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인텔 제품의 성능이 다시 업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다. 현재 인텔은 5나노에서 만들어지는 프로세서들과 직접 경쟁이 가능한 14나노 프로세서를 만드는 기업이다. 설계에서는 비교우위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다. 인텔의 최고 수준의 설계 역량이 파운드리들의 최신 공정에서 꽃을 피운다면 인텔 제품의 성능이 경쟁 제품들의 그것을 앞설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팹라이트로의 전환이 인텔의 반전 카드가 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그동안 회사의 발목을 잡던 수급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파운드리를 활용하기 때문에 효율성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인텔은 그동안 무리하게 공정 전환을 추진했기 때문에, 두 개의 공정을 동시에 준비하느라 인적 물적 자원을 분산시켜야 했다. 이를 그만두는 것만으로도 효율성을 끌어 올릴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그렇게 남게 되는 인텔의 생산 설비들 역시 시장에서 여전히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인텔이 보유한 공정 기술력은 삼성과 TSMC를 제외하면 여전히 업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최신 10나노 슈퍼핀 공정 같은 경우는 초기 7나노 EUV 공정들과도 비견할 수 있는 수준의 높은 집적도와 성능을 제공할 수 있는 공정이다.
이런 공정 기술력을 가지고 맞게 되는 2021년은 전기차, 클라우드 시대로의 전환이 가속화하는 시기로 10나노, 14나노와 같은 이른바 차선단 공정에 엄청난 수요가 예상된다. 최신 공정 싸움에서 밀려난 중위권 파운드리들, SMIC, UMC 같은 기업부터 동부하이텍 같은 중소 파운드리들까지 이러한 흐름을 타고 최근 덩달아 호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때 중위권 파운드리들과 비교에서 확실한 공정 우위를 가진 인텔이 팹 설비 일부를 파운드리로 전환하면서, 늘어나고 있는 차선단 공정 수요를 흡수해 설비의 운영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2021년 팹라이트 전환의 최적 시기
아울러 2021년은 미국 정부의 리쇼어링(해외 진출 기업 국내 복귀) 정책이 강화되는 시기로, 미 정부는 중국, 대만 등에서 이뤄지는 반도체 생산을 미국 본토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현재 미 정부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기업은 인텔이다. 따라서 인텔을 향한 미 정부 차원의 추가적인 지원책, 혹은 미 팹리스 기업과 인텔과 협력 등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는 상황이다.
아직 남아있는 업계 최고 수준의 설계 능력을 통해 다시 한번 성능 싸움에 나서고 적극적인 파운드리 수주를 통해 운영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다. 2021년이 팹라이트 전환의 최적 시기로 꼽히는 이유다. 매년 들려오던 인텔의 팹라이트 전환 소식이 올해는 조금 다르게 들리는 배경이기도 하다.
인텔의 팹라이트 전환을 근거로 반도체 제국의 몰락을 이야기하는 섣부른 주장들도 일각에서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인텔의 생산 역량이 모두 사라지게 되더라도 AMD, 엔비디아와 똑같은 출발점에 서게 되는 것일 뿐이다. 예상되는 시장의 실망, 주가의 하락과 같은 단기적 문제들을 감내하고 인텔은 팹라이트로의 전환 결정을 할 수 있을까?
2021년, 새로운 파운드리 계약이 맺어질 시기, 반도체 제국의 부활을 위한 역사적 결정이 내려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