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들과 정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제중재에 관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글로벌 기업들과 정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제중재에 관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박은영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현 김앤장 법률사무소 국제중재팀장, 현 싱가포르국제중재원(SIAC) 중재법원 상임위원, 전 런던국제중재법원 (LCIA) 부원장
박은영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현 김앤장 법률사무소 국제중재팀장, 현 싱가포르국제중재원(SIAC) 중재법원 상임위원, 전 런던국제중재법원 (LCIA) 부원장

국제 경제 거래를 하는 기업들에 중재는 더는 낯선 영역이 아니다. 더 많은 기업이 상사 또는 투자 분쟁을 중재로 해결해야 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도 투자자-국가 중재 절차(ISD)의 당사자가 되고 있다. 소송에 익숙한 기업들은 중재를 경험하면서 몇 번을 놀라게 된다.

기업들은 ‘중재’에 대해 적당히 타협을 유도하는 ‘조정’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국제중재는 외국 법정절차에 못지않게 복잡하고 엄격한 절차와 광범위한 증거 조사를 통해 진행된다. 기업들이 알고 있던 것은 중재는 신속하고 저렴한 비용으로 분쟁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최근 국제중재는 비용이 저렴하지도 않고 신속하지도 않다. 그러면 이런 중재를 앞으로도 계속해야 할 것인가?

사실 국제중재를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어서가 아니라 최상의 차선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 기업 간에 거래 분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 법원이나 미국 법원을 분쟁 해결 법정으로 선택을 하는 것은 일방에 유리한 점이 있어서 합의되기 어렵다. 과거 한국 기업들이 협상력이 약할 때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법정을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협상력이 강해진 측면도 있다. 그래서 중립적인 법정(neutral forum)으로서 중재가 선택되는 것이다. 집행의 용이성과 비밀 유지 또한 중재의 장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점차 소송 절차화하고 있는 중재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법원이 중재 더 관여해야” 논란도

중재에 대한 논란은 기업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16년 3월 영국 대법원장 토머스 경은 너무 많은 상사 분쟁이 중재로 해결되고 법원이 관여할 여지가 없이 종결되므로 판례가 축적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법원이 더 많이 중재에 관여해야 한다는 취지의 강연을 했다. 그의 주장은 법원과 중재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고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한 국제중재계는 법원의 중재에 대한 폭넓은 관여는 국제적인 기준도 맞지 않고 그렇게 되면 다수가 중재를 기피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퇴임 법관이자 중재인으로 활약하고 있는 인사들도 대법원장이 아닌 중재 커뮤니티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 논쟁의 기저에는 수많은 중요 상사 분쟁이 법원이 아니라 중재로 해결된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바람직한 법질서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영국 최고 법원 법률가들의 고민이 반영돼 있다.

미국의 경우 현재 국제중재에 미국 법원의 증거 조사 절차인 디스커버리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미국법에는 해외에서 진행되는 국제 분쟁 절차에 미국 법원이 증거 조사를 해주는 절차가 있다. 그런데 이것을 국제중재에도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곧 판결할 예정이다.

문제의 발단은 ‘롤스로이스’가 ‘보잉’에 납품한 항공기 엔진에 결함이 있어 그 배상을 하고, 자사에 엔진 밸브를 공급한 업자인 ‘서보트로닉스’에 책임을 묻는 런던 국제중재를 제기한 것이었다. 서보트로닉스는 런던 중재 절차의 증거 조사를 위해 제삼자인 보잉에 문서 제출을 명해달라는 신청을 미국 연방지방법원에 제기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대법원에 상고한 것이다.

쟁점은 과연 미국의 디스커버리를 사기업 간의 중재나 투자자-국가중재 절차에도 확대해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법원마다 의견이 다르고 미국 순회 항소법원들도 3 대 2로 의견이 나뉘었다. 사안의 중대성으로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관련인 참가를 했다. 미국 법무부는 국제 분쟁 절차는 국제재판소나 공적인 재판기관을 의미한다는 전제하에 사적 분쟁 절차인 중재 심리를 확대하는 데 소극적인 입장을 밝혔지만, 다수의 중재 기관, 중재학회 및 중재 전문 교수는 국제중재에도 미국의 디스커버리 절차를 조력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한 결정은 국제중재계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성질 바뀌는 국제중재

이 같은 논란은 국제중재의 성질 변환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중재는 계약 협상의 한 방식으로서 사적 절차에 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재가 실체적 판단에서 공정한 결과를 얻기 위한 사법적 절차를 사용하면서 중재는 상설 법정 밖의 재판 절차와 같은 공적 영역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전통적으로 국제재판소나 공적 재판기관의 절차에 사용되던 미국법 절차를 국제중재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만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국제중재계의 손을 들어준다면 앞으로 국제중재에서는 미국과 최소한의 관련성만 있어도 미국식 디스커버리가 봇물이 터지는 방식으로 진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국제중재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의 결정이 어떻게 나든 점차 소송 절차와 유사해져 가는 국제중재 절차에서 증거 조사 문제는 더욱 확대되고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변화하는 중재 환경과 현재의 중재가 가진 비용과 효율에 대한 불만으로 기업들은 중재를 이용하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송의 경우 중립지에 대한 합의가 어렵고, 집행이 용이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조정이 하나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2019년 체결된 조정에 관한 국제협약(싱가포르 협약)으로 조정에 대한 집행력이 높아진 면은 있으나 그 실용성은 아직 불명확하다. 원하지 않지만, 거래를 하다 보면 분쟁은 발생한다. 국제중재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다시 국제중재를 선택하는 이유는 ‘차선의 선택’을 대체할 것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중재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공정한 룰’이라는 가치와 질서를 형성하면서 그 유용성과 이용 범위를 넓혀 왔다. 1871년 미국과 영국이 남북전쟁과 관련된 분쟁을 전쟁이 아니라 중립적인 중재로 해결하는 앨라배마 사건 중재(Alabama claims tribunal)를 시작점으로 해 중립성과 공정성이 보장되는 국제중재의 시대가 열린 이래, 국가 간 중재를 주로 하는 국제 상설중재재판소를 거쳐 뉴욕협약과 워싱턴 협약하에서 상사중재와 투자자중재로 발전해 왔다. 영국과 미국 법원에서 중재와 법원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필요를 느낄 만큼 국제중재가 광범위하고 폭넓게 활용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글로벌 기업들과 정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제중재에 관여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가지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제중재 시 주의할 점 세 가지

이를 위해 기업들은 세 가지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 계약 체결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국제중재가 제기되는 근거는 중재 합의 조항이므로 명확하고 자사에 유리한 중재 합의 조항을 작성, 협상, 체결하는 데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계약 내용에 대해서도 분쟁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명확하게 방향을 잡고 협상과 타결을 하는 것이 좋다. 분쟁이 발생하면 근거로 삼는 것은 계약서다.

둘째, 투명성이다. 미국 법원의 디스커버리가 아니어도 국제중재에서는 국내 법정보다 증거 조사의 범위가 넓고 자사에 불리한 문서도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는 때도 있다. 국제중재에서 문서 제출은 중요한데 특히 지금처럼 디지털화된 문서 체계에서는 그 중요성이 더 크다. 따라서 비즈니스를 하는 많은 내용이 게시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문서를 생성하고 관리해야 한다.

셋째, 룰을 준수하는 경영이다. 국제중재에서는 궁극적으로 준거법에 따라 결정되지만, 그 과정에서는 합리성과 공정성 있는 기업 관행이 대부분의 중재판정부에 더 잘 받아들여진다. 비즈니스 관행에 대해서도 점차 국제적 기준이 적용되고 그에 따른 비즈니스가 이뤄진 기업에 대해 중재인들은 우호적인 인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국제중재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진 국제중재는 국제 거래와 투자 부문에서 중요한 분쟁 해결 절차로 자리 잡아 외면하거나 회피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거대한 파고를 예측해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권익을 보장받도록 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중재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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