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세계 유력 인사들이 거액의 재산을 해외에 은닉하고 탈세를 해왔다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됐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10월 3일(현지시각)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스위스, 싱가포르 등 조세피난처 14곳에 서비스하는 금융기관과 관련된 거래내역, 개인 이메일 등 1190만 건의 문건을 검토한 결과, 이들이 최고급 저택, 부동산, 요트 등 고가 자산을 세무 당국에 숨겨왔다고 발표했다. ICIJ는 입수한 문건들을 ‘판도라 페이퍼스(Pandora Papers)’라고 명명했다. 판도라 페이퍼스에는 세계 각국 전·현직 지도자를 비롯해 억만장자 기업인,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 수백 명의 이름이 올라있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 터키 건설업계 거물 에르만 일리카크,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레이놀즈 앤드 레이놀즈’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로버트 브로크만, 콜롬비아 출신 가수 샤키라, 독일 슈퍼모델 클라우디아 시퍼 등이다. 이들이 소유한 상당수 계좌는 재산을 감추거나 세금을 회피하게 만들어졌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ICIJ는 앞서 2014년 ‘중국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보고서를 통해 중국 권력층과 갑부들의 탈세 의혹을 폭로하고, 2016년에도 조세피난처에 자금을 빼돌린 세계 유명 인사 명단을 공개한 바 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10월 3일(현지시각) 세계 유력 인사들의 해외 재산 도피·탈세 정황을 담은 문건 ‘판도라 페이퍼스’를 공개했다. 사진 ICIJ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10월 3일(현지시각) 세계 유력 인사들의 해외 재산 도피·탈세 정황을 담은 문건 ‘판도라 페이퍼스’를 공개했다. 사진 ICIJ
카타리나 피스토르(Katharina Pistor)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자본의 코드’ 저자
카타리나 피스토르(Katharina Pistor)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자본의 코드’ 저자

세계 각국 지도층의 해외 재산 도피·탈세 정황을 담은 문건 ‘판도라 페이퍼스’가 전 세계를 분노케 했다. ①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폭로한 이 문건에는 해외에 은밀하게 재산을 숨기고 거짓말을 한 수많은 정치인, 기업인 등의 리스트가 담겨 있다. 이들을 도운 변호인과 회계사의 책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판도라 페이퍼스에 따르면,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말리부와 워싱턴, 영국 런던 등 전 세계에서 집값이 비싼 지역에 약 1억600만달러(약 1290억원)를 들여 10개가 넘는 저택을 사들였다. 그가 혼자 이런 일을 벌였을까. 불가능하다. 그는 자신의 강력한 힘을 이용해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회계사,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변호사 등을 동원했다. 그리고 1995년부터 2017년까지 ② 조세피난처에 30개가 넘는 페이퍼 컴퍼니를 세우고, 미국과 영국 등에 해당 저택을 구매했다.

부유한, 영향력 있는 지도자층이 법을 악용한 것이다. 현재 전 세계 주요국에서 변호인, 입법부와 법원이 사회 엘리트 계층의 편에 서서 법을 제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판도라 페이퍼스 폭로 작업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유층의 재산 은닉 역사는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영국의 토지 이용제도 ‘유스(use)’를 보자. 유스는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양도인이 지정하는 목적에 따라 토지를 관리하도록 제약을 마련한 계약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신탁(trust)’ 개념이다. 유스는 당시 봉건시대에 귀족이 전쟁에 나갔을 때 토지 관리를 맡은 이들이 재산을 빼돌리지 못하게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보다는 토지 소유자가 다른 누군가에게 토지를 맡겨 조세 부담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더 많이 사용됐다.

신탁은 사적 재산을 창출하고 보호하기 위한 가장 독창적인 장치 중 하나다. 문제는 오래전부터 부유층이 신탁을 통해 상속법을 교묘하게 피해왔고, 특히 조세피난처 등의 국가에 자산을 빼돌리고 탈세하는 역외탈세 수단으로 신탁이 악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탁법은 위탁자(신탁의 설정자)와 수탁자(신탁의 인수자) 간의 특별한 신임관계를 기초로 한다. 위탁자가 특정 재산권을 수탁자에게 이전하거나 처분해 수탁자로 하여금 수익자의 이익을 위해 또는 특정 목적을 위해 재산권을 관리·처분하게 하는 관계를 규율하는 법률이다.

신탁은 공식 물권법을 준수하지 않고도 자산에 대한 권리 및 의무 대상 변경 기능을 가져 ‘그림자 재산권(shadow property right)’을 형성한다. 신탁 설정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 이렇듯 투명성이 결여된 신탁 절차는 개인과 세무 당국 간의 숨바꼭질을 전 세계 곳곳에서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법적 정당성 무너져 민주주의 기반 흔들

신탁법은 부유층이 속해 있거나 대변하는 입법자를 통해 조세 회피를 위한 법적 장치로 굳건해지고 있다. 신탁 관리인의 의무가 축소되고, 법적 책임이 줄면서 부유층이 신탁 절차를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됐다는 점도 마이너스 요인이다. 국제 신탁 거래가 늘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1985년 ③ 헤이그 신탁 협약을 체결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각국의 법체계는 자산가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선택할 수 있게 됐다. 그들에게 여권이나 비자는 필요 없다. 오직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할 수 있는 법적 껍데기만 필요할 뿐이다. 조세 회피 혜택을 누리는 소수 부유층은 세금 규모와 규제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뛰어난 로비스트, 변호사를 고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그리고 글로벌 금융시장에 최적화된 법안을 마련할 수도 있다.

법이 부유층의 재산 창출 수단 역할을 한다면, 그 국가와 사회는 불공평을 넘어 더 큰 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다. 법적 정당성은 무너지고 민주주의 통치 방식의 기반은 흔들릴 것이다. 부유층과 변호인들이 그들의 합법성을 주장할수록 대중은 법을 더 믿지 않는다. 전 세계 엘리트층은 지속적으로 법을 활용해 재산을 불릴 것이다. 법의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지도층은 가장 귀중한 자산인 신뢰를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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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1997년 설립된 비영리 탐사보도 기관이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있고, 100여 국가 280명 이상의 탐사보도 기자가 참여하고 있다. 2016년 파나마 등 조세피난처에 막대한 자금을 빼돌린 전 세계 주요 인사들의 명단을 공개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문건은 ‘파나마 페이퍼스’로 불린다.

법인의 실제 소득 전부 또는 상당 부분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국가 또는 지역. 조세피난처를 이용할 경우 기업은 세금 절감이나 탈세를 할 수 있으나 정부 입장에선 엄청난 세수 감소가 발생한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세금을 내지 않거나 축소하는 행위를 ‘역외탈세’라고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대표적인 조세피난처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파나마 등을 지목했다.

헤이그 국제사법회의는 1985년 국제 신탁에 관한 국제사법을 통일하기 위해 ‘헤이그 신탁 협약’을 채택했다. 이 협약은 국제 신탁을 규율하는 준거법의 결정 기준으로, 신탁제도를 두지 않은 국가에서도 신탁에 관한 입법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