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해결 절차에 AI 기술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분쟁 해결 절차에 AI 기술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여러 국적의 당사자들이 모여 국제 분쟁을 해결해가는 대표적인 분쟁 해결 절차인 국제 중재 절차에서 기술의 사용은 거부할 수 없는 일이 됐다. 2020년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국제 거래 당사자들은 수시로 공간 제약 없이 컴퓨터 화면을 통해 상대방과 중재인을 만나고 변론한다. 기술을 활용한 소통의 편리함은 국제 중재 당사자들 사이의 소통과 분쟁 해결이 촉진될 수 있는 근본 토대를 제공한다.

분쟁 해결 절차에서 사람과 유사하게 업무를 처리해 업무 효율을 높이는 인공지능(AI) 기술 활용 사례도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AI 전자 문서 개시 시스템, 예측 기반 코딩을 활용해 대규모 문서들의 특징을 파악, 분류하고 주요 내용을 추출하는 알고리즘 등이 거론된다. 특히 100만 건이 넘는 판례가 축적된 미국 소송에서는 기존 판례 내용을 토대로 유사 사안의 결론을 예측하는 알고리즘도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미국 위스콘신주 대법원은 이미 2017년 AI 알고리즘을 증거로 채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AI 기술의 실체는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사람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을까. (AI의 개념을 사람마다 달리 정의하지만, 본글에서는 사람의 신경망을 모방하는 인공신경망이 활용되는 제반 기술을 포괄하도록 한다) 그 해답은 컴퓨터 기술의 본질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컴퓨터 화면에서 우리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공간 제약을 극복하는 편리함 속에서도 서로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 있다. 식사 자리에서 음식의 맛과 향기, 악수 등 신체 접촉을 통한 관계 형성은 온라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온라인상의 소통 과정에서 인간의 오감(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 중 유독 시각과 청각만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숫자 0, 1의 이진법으로 소통하는 컴퓨터 기술이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제한적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AI가 가장 먼저 발달한 영역 역시 다양한 시각적 데이터를 식별, 분류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AI를 활용한 알고리즘으로 데이터를 식별, 분류하는 ‘다층 인공신경망(Multi-Layer Perceptron)’, 데이터의 주요 특징을 추출하는 ‘합성곱 신경망(Convolutional Neural Network)’, 이미지 합성을 위한 ‘생성적 적대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데이터의 순서를 파악해 인간의 언어 처리가 가능한 ‘순환 신경망(Recurrent Neural Network)’, 언어 해석의 정확성을 높이는 ‘트랜스포머(Transformer)’ 기술이 순차적으로 발전해 왔는데, 사람의 시청각 정보의 처리에 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AI 기술의 발전에도 컴퓨터 기술이라는 본질적인 한계점이 있다. 투입되는 데이터의 양과 질에 따라서 결과물이 결정되고, 처리가 가능한 정보의 유형도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업무 처리 과정에서 통용되는 ‘가비지 인 가비지 아웃(Garbage in Garbage out·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이라는 명제는 AI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경험을 제한적으로 파악하는 컴퓨터 데이터의 특성과 데이터 부족으로 인한 것이므로 기술의 활용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AI 중 가장 보편화한 기술 중 하나로 스팸 필터 기능이 있다. AI는 사용자가 분류한 스팸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을 파악해서 스팸을 분류해 왔고, 사용자는 별다른 개입 없이도 자동으로 스팸이 분류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렇게 AI는 반복되는 사람의 작업 사례를 취합, 자동화함으로써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는 반복되는 작업의 데이터가 없는 영역에서는 AI 적용이 곤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앞서 본 소송 절차에서 활용되는 AI 알고리즘들과 같이 사람의 경험 데이터가 충분히 쌓인 영역에서 AI 기술이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국제 중재 분야에서 AI가 얼마나 활용될 수 있을까? 통상 국제 중재 절차는 비밀 절차로 진행돼 사례 데이터 축적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그런데도 일부 AI 기술 활용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업무 영역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왼쪽부터 김혜성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사법연수원 39기, 현 법무부 국제법무과 해외 진출 중소기업 법률 자문단 위원, 현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유원영 김앤장 법률사무소 외국변호사 조지타운 로스쿨, 미국 뉴욕주 변호사, 현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 젊은 중재인 위원회 멤버, 현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학 겸임교수
왼쪽부터
김혜성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사법연수원 39기, 현 법무부 국제법무과 해외 진출 중소기업 법률 자문단 위원, 현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유원영 김앤장 법률사무소 외국변호사 조지타운 로스쿨, 미국 뉴욕주 변호사, 현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 젊은 중재인 위원회 멤버, 현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학 겸임교수

당사자들의 중재인(Arbitrator) 선정, 준거법 및 중재지 선택에서의 활용(절차 구성)

국제 중재 제도는 뉴욕 협약(1958년 6월 10일 뉴욕에서 채택된 해외 중재 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유엔 협약)을 기반으로 당사자들이 스스로 선정하는 중재인들에 의해, 중립적인 판단 기준을 제공하는 준거법(실체적 법률)과 중재지(절차적 법률) 선택을 통해서 운용된다. 비록 상세한 국제 중재 절차 진행은 비밀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에는 각 중재 기관들의 주도 아래 사건 진행 개요, 판정, 중재인, 준거법과 중재지는 공개되는 사례가 축적되고 있다.

특히 뉴욕 협약과 관련해 각국의 승인, 집행 과정에서 내려지는 판정의 유효성에 대한 판결들은 모두 취합돼 공개되고 있다. 최근 중재 업계의 AI 업체들은 사건 수행 당사자들로부터 중재인의 성향에 대한 정보도 취합하고 있다. 이처럼 AI를 활용해 과거의 반복돼 온 업무 처리 데이터를 취합, 분석한다면, 절차 구성에서의 예측 가능성을 보다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사건 분석, 파악 및 문서 개시를 위한 활용(사건 실체 파악)

국제 중재 사건의 분석, 파악 및 문서 제출 과정은 사건별로 사실관계가 상이해 반복되는 규칙을 찾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최근 국제 분쟁의 규모가 커지고 관련 당사자가 많아지면서 관련 정보가 광범위해지고 정보가 저장된 데이터 형식도 다양화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사람이 모든 정보를 검토하기 곤란하거나, 검토에 과도한 시간과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사람이 일부 문서를 검토해 분류하거나(classification), 일정한 조건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설정해 AI가 활용할 법칙을 만들어 주는 과정(regression)을 접목함으로써 AI가 사람이 지원하는 학습(supervised learning)을 수행해, 광범위한 자료 분석을 보조하도록 하는 방식을 활용해 볼 수 있다. 또 정보가 방대한 사건에서 자료 분석이나 전략을 구축할 때 AI 스스로 수행하는 정보 분류(clustering), 시각화(visualization), 일정한 특징을 토대로 하는 단순화(dimensionality reduction), 법칙 추출(association rule learning) 등의 알고리즘(unsupervised learning·비지도형 기계 학습)을 활용한다면, 비교적 효율적인 업무 진행이 가능하다.

현재 상당수의 국제 로펌들은 AI를 통한 업무 효율화를 위해서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2019년부터 ‘테크-셀러레이트 포 로(Tech-celerate for Law)’라는 로펌의 기술 활용 촉진을 위한 보조금 정책을 시행, 확대해 왔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도 법원 판례 정보의 접근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다.

기술 선진국으로서 국제 중재 분야에서 아시아의 허브로 거듭나고자 하는 한국 시장 역시 국제 분쟁 해결과 관련한 양질의 데이터를 축적해 AI 기술의 활용 가능성을 모색함으로써 더 경쟁력 있는 국제 분쟁 해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