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국제회의에서 개발도상국(개도국)에 대한 지원은 단골처럼 등장하는 메뉴다.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도 선진국은 개도국을 돕기 위한 기후기금을 2019년 200억달러(24조1000억원)에서 2025년까지 최소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하지만 개도국에 대한 특정 목적의 자금 지원에 앞서 근본적으로 개도국의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12월 6일(현지시각) 국제기구 영상회의에서 개도국 경제 회복을 위한 글로벌 공동체 지원을 주문했다. 필자인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세계 금융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는 이상 개도국의 자본흐름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어려워 결국 이들의 경제가 나빠지는 악순환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장 전망이 좋고 개발 기대감이 큰 개도국이 자금을 안정적으로 차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12월 6일(현지시각) ‘1+6 라운드 테이블’에서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개발도상국에 대한 글로벌 지원을 주문했다. 사진 AP연합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12월 6일(현지시각) ‘1+6 라운드 테이블’에서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개발도상국에 대한 글로벌 지원을 주문했다. 사진 AP연합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현 컬럼비아대 지속가능개발센터 디렉터, 현 UN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 대표
제프리 삭스(Jeffrey D. Sachs)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현 컬럼비아대 지속가능개발센터 디렉터, 현 UN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 대표

전 세계 수백 개 금융기관은 11월 영국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기후 변화 해결을 위한 수조달러 규모의 자금 지원을 선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거대한 장벽이 있다. 바로 세계 금융 시스템이 사실상 개도국의 자본흐름을 방해해 이들 국가가 재정 위기의 덫에 빠지고 있는 현실이다.

경제는 크게 △건강·교육 등 인적 자원 △전기·디지털·교통·도시 등 인프라 △산업에 대한 투자로 돌아간다. 빈곤국은 세 가지 영역에 대한 1인당 투자 자본이 적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세 개 영역에 대한 자본 투자가 균형적으로 이뤄지면 빈곤국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물론 이런 성장은 과거의 무차별적 성장 방식이 아닌 디지털과 환경을 고려해 이뤄져야 한다.

글로벌 채권 시장과 은행 시스템은 지속 가능하면서도 타 국가를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는 고성장이 가능한 개도국에 충분한 자금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 채권 시장과 은행에서 개도국으로 흐르는 자금은 여전히 적고 불안정하다. 개도국은 부유한 선진국과 비교하면 차입금에 대해 매년 5~10% 더 높은 이자를 부담하고 있다. 개도국과 채무국은 동일하게 위험성 높은 집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신용평가기관이 등급을 산정할 때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에게 기계적으로 낮은 등급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은 과장됐고, 때로는 ①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부가 공공 투자를 위한 자금을 조달할 때 일반적으로 정부의 세입 대비 부채가 장기적으로 허용되는 수준이라면 채권 발행 가능 여부는 (채권의 일부 또는 전체를) 상환할 수 있는 재융자(refinancing) 능력에 달려 있다. 만약 정부가 만기가 도래하는 채무에 해당하는 자금을 다시 조달할 수 없다면, 이는 낮은 신용이나 장기 파산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현금 부족으로 채무불이행(디폴트)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크다.


개도국 신용에 대한 편견

국제 사회의 채권국 혹은 신용평가기관은 종종 임의로 (개도국을 포함해) 특정 국가의 신용을 믿지 않는다. 이런 인식은 신규 대출의 ‘갑작스러운 중단’으로 이어지고, 재융자가 어려워진 국가는 결국 채무불이행 위기에 내몰린다. 채권국과 신용평가기관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임의로 내린 특정 국가의 신용에 대한 우려를 ‘정당화’하는 결과를 얻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개도국) 정부는 보통 긴급한 자금 조달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내미는데, 해당국이 세계 금융시장에서의 평판을 되찾는 데는 수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이것이 다수의 개도국이 처한 현실이다.

자국 통화로 자금을 마련하는 부유국의 경우 신규 대출이 갑자기 중단되는 이러한 일을 겪지 않는다. 자국의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에 자금을 빌려주는 일은 상대적으로 안전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만기가 도래하는 국채를 매입해 사실상 부채 상환이 늦춰지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한다고 보면 유로존 국가들도 상황은 미국과 마찬가지다. 2008년 유럽중앙은행이 금융 위기 여파로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하지 못하자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을 포함한 일부 유로존 국가가 세계 금융시장에 접근할 수 없었다. ECB는 유로존 해체 위기까지 거론된 해당 사건 이후 채권 발행 기능을 강화했다. ECB는 유로존 채권을 대량 매입해 양적 완화를 시행했고, 이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국가들의 차입 조건을 완화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불거진 2008년의 상황을 제외하고 선진국은 통상 낮은 금리로 유동성 우려 없이 자국 통화로 자금을 차입해 왔다. 반면 저소득 국가와 중하위 소득 국가는 주로 달러화와 유로화 등 해외 통화를 빌려와 예외적으로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하고, 갑작스러운 대출 중단이라는 어려움까지 겪는다. 가령 가나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83.5%로, 그리스(206.7%)나 포르투갈(130.8%)보다 훨씬 낮다. 그럼에도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가나의 신용등급을 B3로, 그리스(Ba3)나 포르투갈(Baa2)보다 낮게 평가했다. 결국 가나는 10년 국채에 9%의 이자를 부담해야 하지만, 그리스와 포르투갈은 각각 1.3%와 0.4%의 이자를 지불한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 피치 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다수의 부유한 국가와 중상위 소득 국가에 투자적격등급(investment grade)을 부여한다. 반면 대부분의 저소득 국가, 중하위 소득 국가에는 하위투자등급(sub-investment grade)을 매긴다. 일례로 무디스는 중하위 소득 국가 중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만 투자적격등급을 부여한 상황이다.

국가 신용등급은 한 번 떨어지면 정부가 중앙은행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 한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2010년대 바베이도스, 브라질, 그리스, 튀니지, 터키 등 20개국의 신용등급이 하위투자등급 이하로 떨어졌다. 이 중 신용등급을 회복한 다섯 국가 중 네 국가는 헝가리, 아일랜드, 포르투갈, 슬로베니아 등 유럽연합(EU) 회원국이다. 다른 한 곳은 러시아다. 신용등급을 회복한 국가 중 남미(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는 한 곳도 없었다.

세계 금융 시스템 정비가 시급하다. 사실 오래전에 정비가 끝났어야 했다. 성장 전망이 좋고 개발 기대감이 큰 개도국은 안정적인 시장 조건으로 자금을 안정적으로 차입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 20개국(G20)과 IMF는 각국의 성장 전망과 장기 채무 안정성을 반영한 새로운 신용평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국제결제은행(BIS)의 규제 또한 신규 신용평가 시스템에 맞춰 개정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개도국에 대한 갑작스러운 대출 중단을 막기 위해 G20과 IMF는 개도국 국채가 발행되는 2차 시장의 유동성을 지원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 연준과 ECB를 포함한 주요 국가의 중앙은행은 저소득 국가 및 중하위 소득 국가와 ② 통화스와프 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세계은행(WB)과 다른 개발 금융기관 또한 개도국을 대상으로 하는 보조금 지원과 담보 대출을 늘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내 일부 주를 포함해 부유한 선진국이 자금세탁이나 조세피난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면, 개도국으로 흘러갈 지속가능개발 자금 규모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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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미래에 대한 기대와 예측에 부합하기 위해 행동해 실제로 기대한 바를 현실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저서 ‘사회 이론과 사회 구조(Social Theory and Social Structures)’를 통해 제시했다. 그는 사람들이 상황의 실제적 사실보다는 상황에 부여된 의미에 근거해 행동한다고 했다. 특히 부정적인 자기 충족적 예언은 결국 상황에 대한 잘못된 판단과 정의를 야기해 처음의 잘못된 생각을 현실화한다고 봤다. 낙인효과와도 일치하는 현상이다.

두 국가가 현재의 환율(양국 화폐의 교환 비율)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상대국 통화를 서로 교환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최초 계약 때 정한 환율로 원금을 재교환하는 거래다. 유동성 위기를 피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