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강대 법학과, 사법연수원 39기, 전 퀸 엠마누엘 어쿼트 앤드 설리번(Quinn Emanuel Urquhart & Sullivan) 파트너 변호사
지난 2년여에 걸친 기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뒤이은 각종 변이 바이러스는 바이오산업 등 일부 특수 영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군에 유례없는 악영향을 끼쳤다. 국제거래의 영역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해외 사업파트너가 계약을 위반하더라도 코로나19에서 비롯된 각종 불확실성으로 인해 당장 국제중재 등을 통해 다투기보다는 ‘일단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 지켜보자’는 태도를 취해온 기업들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진 백신 접종률, 치료제 개발, 입국 절차 완화 등에 힘입어 그간 묵혀 뒀던 국제중재의 신청 또는 방어에 관한 자문을 구하는 의뢰인이 다시 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이 국제중재에서 승소하기 위해 절차적인 관점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국제중재, ‘절차설계의 미학’
국내 법원에서의 민사소송이나 국제중재 모두 법적 절차 내에서 각 당사자가 공방을 주고받은 뒤 심판관의 판단을 통해 승패를 정한다는 측면에서 격투기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송법 등을 통해 이미 만들어진 절차 내에서 사실 및 법률에 관한 주장만을 할 수 있는 민사소송과는 달리, 국제중재의 경우 해당 격투기의 룰, 즉 절차와 규칙 등을 당사자들이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민사소송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경기를 치러야 하는 올림픽 복싱 경기라면, 국제중재는 상대방과 합의를 통해 라운드 횟수, 경기장 규격, 타격 방식 등을 정할 수 있는 이벤트 매치 혹은 사설 종합격투기(MMA) 경기에 가깝다. 국제중재에서는 당사자들의 합의를 통해 해당 절차의 세부 사항을 정할 수 있고, 심지어는 판사 역할을 하는 중재인도 당사자들이 선택해 임명할 수 있다.
이는 국제중재 당사자들이 분쟁 절차 내에서 제기될 주장과 증거를 감안해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해당 중재절차를 ‘설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본인에게 유리한 절차를 설계한 당사자가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국내 법원에서 민사소송으로 다툴 경우 기각될 가능성이 큰 주장이라 하더라도, 이에 맞게 설계된 중재절차에서는 180도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2017년 8월 무패의 프로 복서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와 UFC 라이트급 챔피언 코너 맥그리거 간 12라운드 복싱 룰로 진행된 경기에서는 메이웨더가 10라운드 TKO 승을 거뒀지만, 만약 복싱 룰이 아닌 MMA 룰을 적용했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제중재의 경우 소송과 달리 실체적 주장에 못지않게 절차적 전략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관계 및 법적 쟁점 초기 분석이 필수
그렇다면 유리한 국제중재절차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까.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정확히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 사실관계에 적용되는 법리를 검토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국제중재절차가 개시되기 전(중재신청서가 제출되기 전) 사실관계를 완벽히 파악하고 관련 증거를 모두 수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도 있겠지만, 가능한한 광범위한 사실관계 확인 절차를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뢰인을 대리해 여러 국제중재절차를 진행하다 보면 실제 억울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를 입증할 증거가 확보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최근 증가하고 있는 복잡한 합작 투자나 기업 인수합병 계약서상 각종 협조 의무 위반이 문제 되는 사건에서는 일방 당사자의 악의 유무가 문제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주관적 요소의 입증은 방대한 자료 검토를 수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포렌식(디지털 증거 추출) 기법에 의한 자료 수집이다. 수십 개의 컴퓨터, 기타 장치에 저장된 자료를 변호사나 직원이 일일이 보지 않고서도 키워드 입력 등을 통해 관련 있는 자료만을 걸러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는 방식이다. 최근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실제 이러한 포렌식 기법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에 비해 사실관계 확인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이 적어졌다.
사실관계가 확인되고 나면 해당 사건에 적용되는 준거법 검토를 통해 스스로 해야 할 법적 주장, 상대방이 해올 것으로 예상되는 법적 주장, 각 당사자의 주장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증거로 확보된 것과 추가로 확보해야 할 것 등을 파악해야 한다.
전략적 국제중재절차 설계로 우위 확보
이와 같이 사실관계와 법적 쟁점에 관한 초기 분석을 통해 자신의 강점과 약점이 어느 정도 파악된 뒤에는 그 강점을 최대한 부각하면서 약점을 방어할 수 있고 또 반대로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한 드러내고 상대방의 강점을 중화할 수 있는 절차와 규칙을 설계해야 한다.
이런 절차와 규칙 대부분은 절차의 시작 단계, 즉 국제중재 신청서와 답변서가 제출된 직후에 합의된다. 관련해 고려해야 할 요소는 무궁무진하지만, 지면 관계상 몇 가지 예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중재인 임명이다. 대부분의 국제중재절차에서는 3인의 중재인으로 구성된 중재판정부에 의해 심리되는데, 보통 각 당사자가 1인씩 중재인을 선임하고 당사자에 의해 선임된 중재인 2인이 의장 중재인을 선임하게 된다.
중재인은 법원의 판사와 마찬가지로 해당 사건에 관한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기에 초기 분석 결과와 중재인 후보 개개인의 국적, 성향, 교육 배경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신중히 선임해야 한다.
예컨대 일부 영미계 중재인들의 경우 국내 기업들의 문서 보존 방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특정 문서가 고의로 삭제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 사건에 경험이 많고 국내 기업 문화에 익숙한 영미계 중재인이 누구인지를 먼저 파악한 후 후보를 정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특정 증거의 공개를 요청할 수 있는 문서 개시절차다. 이는 국내 민사소송법하에서 인정되는 문서 제출 명령보다 훨씬 강화된 수단으로, 증거 확보가 어려운 당사자가 매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절차다. 국제중재의 경우 문서 개시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당사자의 합의로 이를 진행하지 않거나 범위를 정할 수도 있어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또한 국제중재의 경우 당사자들이 서면을 교환할 횟수, 순서, 증거 제출 방식, 구두심리기간, 구두변론 순서 등도 당사자의 합의에 의해 정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실관계 및 법적 쟁점에 대한 초기 분석 결과에 따라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절차가 합의될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아가 국제중재의 신청 또는 방어를 고려하고 있는 당사자는 중재절차 내에서의 전략뿐 아니라 중재 외에서 취할 수 있는 법적 절차, 예컨대 관할 있는 법원에서의 보전처분(가압류, 가처분 등), 긴급중재인제도, 관련 민사소송의 제기 등을 통해 전장을 넓히는 전략도 검토해볼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국제중재절차의 개시 전 또는 초기 단계에서의 분석을 통한 전략 수립은 해당 절차 내에서의 적극적인 공격이나 방어 못지않게 중요할 수 있다.
모쪼록 국제중재에 직면한 당사자들이 사건 초기에 국제중재 전문가와 함께 최선의 전략을 수립하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