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통상 정책은 철저한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였다. 당시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전 행정부 시절 추진하던 TPP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며 탈퇴를 선언했다. 취임 1년이 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트럼프 지우기’를 부지런히 해나가면서 ‘미국이 돌아왔다’는 구호를 내걸고 국제 질서 재편에 힘을 싣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외교를 뒤집고 동맹·파트너 규합을 강조하고 있다. 트럼프 이전에 미국이 누렸던 국제 사회에서의 리더십 회복에도 집중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위해 작년 1월 출범 직후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파리기후협약에 재가입하고, 세계보건기구(WHO)에 복귀했으며, 이란과 다시 핵 협상에 나섰고, 세계무역기구(WTO)에 화해의 손짓을 보냈다. ‘오바마 정책 계승’을 다짐한 바이든 대통령이 2020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하자 미국이 TPP에 복귀할 가능성이 크게 점쳐졌다. 그러나 아직도 미국은 TPP에 돌아오지 않았다. 미국이 TPP에서 빠진 이후, 일본 주도 아래 나머지 회원국들(TPP 11)이 이름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바꿔 2018년 공식 서명했다. 일본은 미국의 재가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러스트벨트(미 중서부 지역과 북동부 지역의 일부 영역, 2016년 트럼프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지역 표를 의식하는 바이든 대통령은 트럼프 정책을 완전히 뒤집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리스크(위험)가 수반되자 주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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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다카토시 컬럼비아대 국제·공공정책학 교수 현 도쿄대 국립정책대학원 국가정책연구원 선임 교수, 전 일본 재무성 차관보
이토 다카토시 컬럼비아대 국제·공공정책학 교수
현 도쿄대 국립정책대학원 국가정책연구원 선임 교수, 전 일본 재무성 차관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고립주의, 보호주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 우선주의)’는 미국과 글로벌 리더십에 심각한 피해를 줬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은 국제 리더십 역할을 일방적으로 포기하면서 무역과 기후 위기관리에 관한 국제 사회 규칙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어 미국은 2015년 파리기후협약, 세계보건기구(WHO)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했고,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위원 임명을 반대하면서 WTO를 공격했다. 트럼프의 고립주의는 유럽과 일본 등 미국의 핵심 동맹국까지 고통스럽게 했다.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자유무역과 규칙에 기반을 둔 다자주의라는 도덕적 지위를 포기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미국의 파리기후협약과 WHO 재가입을 비롯해 트럼프 때의 경제, 환경, 코로나19 정책 등 많은 것을 빠르게 뒤집었다. 그러나 여전히 트럼프의 보호주의 무역 조치를 철회하는 데는 속도를 내지 않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을 맞았지만, 아직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일부 그대로 남아있다. TPP를 계승한 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관한 미국의 재가입 논의가 없는 게 그 예다. 또 WTO 부활에 관해서도 논의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이런 바이든 행정부의 소극적인 행보는 곤혹스럽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을 미국의 가장 큰 경쟁국으로 보고 있고, 이런 중국을 향한 그의 정책 목표도 분명했다. 작년 12월, 바이든 대통령은 111개국 민주주의 국가 정상을 화상으로 초청해 ② ‘민주주의정상회의(Summit for Democracy)’를 진행했다. 여기서 그는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적인 국가로 인해 발생하는 과제를 논의했다. 그런데도 바이든 행정부는 왜 CPTPP 가입을 서두르지 않는 것인가.

CPTPP의 전신인 TPP는 2016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미국을 포함해, 중국을 제외한 12개 환태평양 지역 국가들끼리 체결했다. 이 협정은 포괄적인 자유무역과 투자를 증진하고 지식재산권(IP)을 보호하며 전자상거래를 규제하고 회원국이 공기업을 통해 불공정한 우위를 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지역경제 동맹을 지향했다. 또 TPP에는 암묵적으로 한국을 제외한 태평양 주요 국가가 중국을 상대로 더욱 효과적으로 경쟁하기 위한 목적도 담겨 있다. 이후 CPTPP는 미국의 가입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영향력을 키워 왔다.

배경은 이렇다. 오랜 기간 중국 시장에 의존하는 여러 국가는 중국이 제시하는 무역·투자에 관한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예컨대 중국 당국은 외국계 기업이 중국에 외국 자본이 100% 투입된 자회사를 세우기보다 중국 현지 파트너사와 합작법인(JV)을 세우기를 요구한다. 또 국유은행이 공기업에 자금을 대주면서 중국에서 사업을 펼치는 외자기업이 속한 다른 국가들은 과도한 보조금 지급에 불평한다. 이런 상황에서 TPP는 회원국 간 자유와 공정 무역, 규칙 기반 투자를 확대하면서 중국이 무역 상대국을 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규칙을 마련하고자 했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이 TPP에서 탈퇴한 이후 남은 회원국 중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실질적인 CPTPP 리더가 됐다. 기존 TPP 협상 당시 미국이 추진했던 조항 중 일부는 보류됐지만, 미국이 조약에 동의하면 재도입될 수 있다. CPTPP는 현재 잘 기능하고 있다. 다만 미국의 존재를 놓치고 있다.

미국이 신흥 아시아·태평양 무역과 투자 체제를 외면하면서 지난 5년을 낭비하는 동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진전이 생겼다. 첫째, 중국·일본·한국·호주·뉴질랜드 그리고 아세안(ASEAN)에 속한 10개국이 ③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에 가입한 것이다.

올해 1월 1일 발효된 RCEP 회원국 교역량은 전 세계 상품 무역의 13%인 2조5000억달러(약 2978조원) 규모에 달하고, 회원국 15개국이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한다. 그리고 RCEP은 중국과 일본 간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며, 이로 인해 양국 무역 관계가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흥 시장인 아세안 경제를 수용하기 위해 RCEP에 따른 평균 관세는 CPTPP보다 높게 설정됐다. 투자 범위도 좁다.

둘째, 2021년 9월, 중국과 대만이 CPTPP에 각각 가입 신청한 것이다. 이는 리더를 맡고 있던 일본 정부에 큰 난제가 됐다. 기존 CPTPP 회원국이 중국과 협상해 합의문의 높은 진입 기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니면 노선의 강도를 두고 회원국 간 의견이 갈리는지 말이다. 더욱이 중국은 대만의 협정 가입을 두고 강경 노선을 취하겠지만, 기존 CPTPP 회원국은 글로벌 반도체 제조를 선도하는 대만이 CPTPP에 가입하는 게 추가적인 경제 안보 혜택을 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이를 두고 중국은 거칠게 반응할 수 있다.

일본이 CPTPP에서 중국·대만과 어려운 정치·경제적 게임을 벌일 준비가 됐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의 강한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미국이 CPTPP에 빠르게 가입하면 아시아·태평양 국가와 무역은 강화되고, 중국과 경쟁에도 노력을 더 기울일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CPTPP 가입을 긴급한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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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

기존에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미국이 빠지면서 일본 등 아시아·태평양 11개국이 새롭게 추진한 경제 동맹체다. 이 과정에서 이름도 CPTPP로 바뀌었다. 2018년 12월 30일 발효됐으며, 일본이 주도하고 있다. 이 협정이 발효되면서 총인구 6억9000만 명, 전 세계 GDP의 12.9%, 교역량의 14.9%에 해당하는 거대 경제 동맹체가 만들어졌다. 중국은 지난해 9월 CPTPP 가입을 신청하며 앞서 TPP에서 빠진 미국의 빈자리까지 차지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CPTPP는 상품 시장 개방률이 RCEP 대비 10%포인트가량 높은 95% 수준으로, 중국이 가입할 경우 경제적 파급 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1년 12월 9일부터 이틀간 바이든 대통령이 주도한 화상 회의로, 111개국 민주주의 국가 정상들이 모였다. 미국은 권위주의 독재 국가들과 맞서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민주 진영 결속을 다졌다. 중국과 러시아와 같은 비(非)민주적 국가는 회의 참가국에서 제외됐다. 다만 참가국을 두고 논란이 생겼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국가도 다수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이번 회의에 중국‧러시아 겨냥이라는 지정학적 요인을 섞은 탓이다. 일례로 선거에서 언론·시민단체·학계의 활동이 억압된 인도도 중국의 대항마로 초청됐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최근 몇 년 새 중국이 주도하는 RCEP과 일본이 주도하는 CPTPP가 잇따라 발효되며 통상 부문에서 새판이 짜이고 있다. 이 중 RCEP에는 한국·중국·일본·아세안(ASEAN)·호주·뉴질랜드 등 15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이 중 국내 절차를 완료한 일본, 중국 등 10개국에서 올해 1월 1일 우선 발효됐다. 한국에서는 2월 1일부터 발효될 예정이다. RCEP은 일본 입장에서 한국, 중국과 첫 자유무역협정(FTA)이라 할 수 있다. 향후 협정국 간 관세 인하, 공급망 변화 등의 경제적 효과도 기대된다. RCEP은 2012년 11월에 교섭을 시작했고 인도가 탈퇴하는 등 여러 고비가 있었으나 2020년 11월 서명을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