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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건영 신한은행 WM그룹 부부장전 신한은행 AI 자본시장 분석팀 파트장, ‘부의 대이동’ ‘부의 시나리오’ 저자
오건영 신한은행 WM그룹 부부장
전 신한은행 AI 자본시장 분석팀 파트장, ‘부의 대이동’ ‘부의 시나리오’ 저자

최근 글로벌 경제를 논하는 데 가장 화두가 되는 단어는 단연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다. 2008년 리먼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전 세계는 ‘저성장 저물가’의 늪에 빠져 있었다. 물가가 낮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는 경제 주체의 기대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소비를 크게 늘리지 않는 일본식 디플레이션(물가 전반의 장기간 하락 현상)의 공포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만연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공포는 2018년 미·중 무역 전쟁과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사태 당시 정점에 달했는데, 팬데믹 사태로 인한 충격으로 국제 유가가 마이너스 수준까지 하락하는 등 디플레이션 공포가 절정에 이르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를(연준·Fed) 포함한 글로벌 중앙은행들과 각국 정부는 이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서게 됐다. 특히 미국은 2020년 4월 2조2000억달러(약 2668조원), 2020년 12월 9000억달러(약 1091조원), 2021년 3월 1조9000억달러(약 2304조원)의 돈을 풀며 강력한 재정 부양에 나섰고, 경기 부양책마다 직접적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개인에게 현금을 지급했다. 

이러한 이례적인 경기 부양책으로 인해 코로나19로 인한 보건 위기가 종식되지 않았음에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소비 폭발이 일어났고, 과도한 소비 폭발은 금융 위기 이후 잠들어 있던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깨우게 됐다. 앞서 언급한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장기간 하락하는 현상이다. 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게 되면 경제 주체들은 소비를 최대한 미래로 연기하고, 물가가 충분히 하락한 이후에 제품 구매에 나서게 된다. 결국 당장의 소비가 크게 줄어들어 기업들의 마진(이익)도 줄어들게 되고, 기업의 투자 위축과 함께 고용 축소 그리고 전반적인 경제의 성장 둔화로 이어지게 된다. 

반대로 인플레이션은 물가가 상승하는 현상이다. 물가가 상승한다면 물가가 오르기 전에 미래 소비를 현재로 앞당기려는 기대가 커지게 된다. 그럼 당장의 소비가 많이 증가하게 되면서 기업들의 투자가 활성화하고, 이는 고용의 증가와 경제 전반의 활력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렇지만 적절한 인플레이션이라면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하지만 최근과 같이 4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급등하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인플레이션은 소리 없는 도둑에 비유되곤 한다.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경제 주체의 소비 욕구를 꺾어버리게 된다. 미국의 임금 상승률은 5% 수준인데, 물가 상승률은 7%를 넘었다. 임금보다 물가가 더 많이 상승하기 때문에 물가를 감안한 사람들의 실질 임금은 오히려 마이너스를 기록하게 된다. 실질 소득의 축소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데, 이 같은 과도한 인플레이션은 경제 주체들의 소비를 둔화시키는 악재로 작용하게 된다. 개인은 분명히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그렇지만 물가가 급등하면서, 개인이 받은 월급의 실질적인 가치는 낮아지게 된다. 더 많은 월급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은 맞지만, 늘어난 월급을 모두 합해도 그 전에 살 수 있었던 만큼의 물건을 살 수 없게 된다. 그 누구도 주머니 속의 돈을 훔치지 않았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그 돈의 실질 가치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만약 인플레이션이 지금의 수준을 넘어 더욱 빠르게 상승하고, 그런 추세가 장기간 이어진다면 경제 주체들의 근로 욕구 역시 크게 낮아질 수 있다. 이는 인플레이션은 강하게 남아 있는데, 경제 전반의 성장세가 둔화되는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경제 불황 속에서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상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사람들의 예금 보유 욕구 역시 크게 낮춘다. 예금 금리가 연 3%라고 가정해보자. 나름 높은 금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만약 물가가 매년 10%씩 오른다면 굳이 3% 금리를 주는 예금에 돈을 넣어둘 이유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예금에서 돈을 인출해서 무언가 현물을 미리 사들이는 행동을 할 것이다. 이들의 제품 매입이 크게 늘면서 물가 상승세는 더욱더 강해지게 된다. 반면 은행에는 예금이 부족해지면서 경제 전반의 성장을 자극하는 대출을 위한 재원이 부족해진다. 그러면 은행들은 물가 상승률을 넘는 예금 금리를 적용하면서 자금을 조달하게 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대출 금리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경기 부양을 진행하면서 각국 정부를 비롯한 기업, 가계까지 대부분 과도한 부채의 늪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부채가 과도한 상황에 나타나는 금리 상승은 대출 이자 부담을 크게 높이면서 성장 잠재력을 더욱 훼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재 치솟고 있는 인플레이션 그 자체도 문제지만, 이렇게 치솟은 인플레이션이 상당 기간 이어졌을 때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과도한 인플레이션이 장기화하면 경제 주체들의 마음속에는 물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오르게 될 것이라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강화된다. 인플레이션 기대가 굳어지면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을 더욱 강화하게 되는데, 물가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 미래의 소비를 앞당겨 지금 소비하는 경향이 만연해진다. 그러면 지금 당장의 물가도 더욱더 높아지지만, 미래에도 그 뒤의 미래 소비까지 계속해서 앞당기면서 물가 상승세가 상당 기간 이어질 수 있다. 1970년대를 우리는 인플레이션의 시대로 기억한다. 인플레이션 기대가 강했기에 10년 이상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고, 이런 인플레이션을 꺾기 위해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80년대 초반 미국의 통화량을 옥죄면서 기준금리를 20% 가까이 상승하도록 유도한 바 있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쳐 인플레이션이 고질병이 됐을 때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질 수 있고 더욱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다’라는 말처럼 지금도 매우 강해져 있는 인플레이션이지만 지금이라도 이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가래로 막아야 하는, 혹은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괴물로 성장할 수 있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갑작스레 인플레이션에 초점을 맞추면서 강하고 빠른 긴축 스탠스로 전환하고 있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