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월 24일(이하 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크이우(키예프)를 미사일로 공습하고 지상군을 투입하면서 전면 침공을 감행했다. 푸틴 대통령은 군사작전 목표로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중립적 지위, 탈(脫)나치화(denazification)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번 침공은 과거 크름반도, 돈바스 지역 등을 무력 쟁취한 푸틴 대통령이 또다시 ‘러시아 팽창’ 야욕을 드러낸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에 독일, 프랑스, 영국, 헝가리, 스웨덴 등 유럽 각지와 미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에 나선 우크라이나인과 각국 시민들은 푸틴 대통령을 ‘21세기 히틀러’로 평가하는 등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 내부에서도 반전(反戰) 시위가 일어났다. AP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내 군사 작전 개시를 승인한 당일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러시아 53개 도시에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시민 수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러시아 경찰이 시위대 체포에 나섰지만, 시위는 이어졌고 현재까지 구금된 시위 참가자는 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는 1인 시위자도 체포 시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보리스 옐친(오른쪽) 초대 러시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 사진 셔터스톡
보리스 옐친(오른쪽) 초대 러시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 사진 셔터스톡
카타리나 피스토르(Katharina Pistor)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자본의 코드’ 저자
카타리나 피스토르(Katharina Pistor) 미국 컬럼비아대 로스쿨 교수 ‘자본의 코드’ 저자

독재 대통령의 명령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우크라이나 국민뿐만 아니라 러시아 국민까지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터무니없는 침략 행위에 항의하기 위해 (체포)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민주주의 국가가 되지 못했던 나라에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민주화 기회를 날린 것은 푸틴이 아니라 서방 국가였다. 30년 전 소련이 붕괴한 이후 미국 경제학자들은 러시아 지도자에게 경제 개혁에 집중하고 민주주의는 뒷전으로 미루도록 설득했다. 결국 푸틴 정부가 들어선 후 러시아 민주화는 없던 일이 됐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결코 사소한 우연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민주주의 국가가 됐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유럽 확장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서방이 러시아 문명을 존중하고 있는지에 관한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 일들을 복기해보자. 1991년 11월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당시 러시아 대통령인 ① 보리스 옐친에게 13개월 동안 개혁에 착수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1991년 12월 ② 벨라베자 조약으로 독립 국가 연합이 창설되면서 소련은 해체됐고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서로의 독립을 존중하기로 선언했다.

러시아 개혁가들과 서방 학자들에게 둘러싸인 옐친은 전례 없는 경제적 ③ 충격요법을 시행했다. 대통령 결정에 따라 가격이 자유화됐고, 국경이 열렸으며, 빠른 민영화가 시작됐다. 옐친 지지자 중 누구도 그 정책이 러시아 국민이 원하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국민이 러시아를 위한 헌법 기반을 발전시킬 기회나 선거를 통해 그들을 이끌 지도자 선출을 원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러시아 개혁가와 서방 경제학자들은 시장 개혁이 헌법 개정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단순하게 결정짓고, 민주주의는 경제 정책 입안을 지연시키거나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빠르게 행동해야 러시아가 경제적 번영을 이루고 공산주의자들이 영원히 권력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또 급진적 시장 개혁을 통해 러시아 국민이 눈에 보이는 이익을 얻게 되면 자동으로 민주주의에 매료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옐친 정부는 경제, 사회, 법, 정치 등 모든 측면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소련식 중앙계획경제를 13개월 내 개혁하겠다는 러시아의 계획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가격과 무역 자유화 자체로만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관련) 법률을 만들어낼 기관이 필요했지만, 이를 세울 시간조차 없었다. 물론 거리에 시장이 생겨나고 극심한 결핍(shortage)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기업과 가계가 필요로 하는 자원 배분을 촉진하는 시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충격요법은 급작스럽고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촉발해 대중이 (옐친 정부의) 개혁과 개혁자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했다.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더는 옐친의 권력 확장을 허용하지 않았고, 이후 일어난 일은 러시아의 권위주의적 대통령제의 부상을 위한 발판이 됐다.

옐친과 그의 지지자들은 포기를 거부했다. 옐친은 1977년에 만들어진 러시아 헌법이 위법이라고 선언하고, 일방적 집권을 유지하면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와 의회는 이를 거부했고, 심각한 정치 위기가 불거졌다. 1993년 10월 옐친이 러시아 의회를 해산하기 위해 소집한 탱크에 의해 교착 상태는 해결됐지만, 14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옐친은 국가의 미래와 관련한 논쟁을 무력으로 해결한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민주적) 투표가 아닌 탱크(무력)로 해결한 것이다. 옐친과 그의 지지자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입법권과 거부권을 갖지만, 견제와 균형은 전혀 없는 강력한 대통령을 위한 헌법을 통과시켰다.

옐친의 측근이었던 드미트리 바실리예프 전 러시아 연방증권위원회 위원장과 나눈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필자가 옐친 정부의 헌법 초안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을 때 바실리예프는 “잘못된 사람이 집권하면 (헌법을) 바로 고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고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바실리예프의 발언은 당시 경제 개혁가들이 입헌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확실히 보여줬다.

1993년 12월, 새 의회 선거와 함께 실시한 국민투표를 통해 새 헌법이 채택됐다. 선거에서 옐친의 후보자들은 완전히 패배했지만, 대통령의 새로운 헌법적 권한이 확보되면서 경제 개혁은 계속됐다. 결국 옐친은 1996년 재선에 성공했고, 3년 후 그는 푸틴을 총리로 임명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세웠다.

러시아의 중앙집권적 정권의 역사를 고려하면 이 나라의 민주화는 가능성이 희박했을지도 모르지만, 시도할 만한 가치는 있었다. 민주적 절차보다 경제적 목표에 우선순위를 둔 무분별한 선택의 결과는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볼 수 있듯, 탈냉전 이후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를 우선한 서방의 결정은 동유럽을 넘어 또다시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Tip

러시아 초대 대통령. 1931년 2월 1일 우랄산맥 부근인 스베르틀로프스트주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건설 엔지니어로 일하다 1961년 공산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1989년 3월 소련인민대의원에 당선된 후, 급진적 러시아 개혁을 주창해 대중의 지지를 얻어 1991년 6월 57% 지지율로 러시아 최초 직선 대통령이 됐다. 이후 1996년 재선돼 연임에 성공했지만, 두 번째 임기가 끝나기 몇 달 전인 1999년 12월 31일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후,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했다. 그는 구소련 붕괴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러시아를 공산주의 계획 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옮기는 개혁(민영화와 국가 자산 매각, 사회보장제도 축소, 세금 제도 신설 등)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동시에 수많은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임기 말에는 국영 석유사 헐값 매각, 체첸 전쟁 실패, 1998년 러시아 루블화 폭락 등으로 지지를 잃었고, 2007년 4월 23일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지도자가 소비에트 연방 해체 및 독립 국가 연합 창설에 협의한 조약이다. 이 조약을 계기로 소련은 사실상 해체됐다.

충격요법은 시장 경제 체제를 갖추기 위해 러시아가 시행한 가격 자유화, 외환 규제 철폐, 개인 자산 자유 보장 등 급진적 경제 정책을 일컫는다. 옐친 정부는 1991년 말 경제 개혁을 목표로 미국 서방 경제학자들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관련 기관들에 조언을 구했다. 이후 1992년 1월 이전까지 고정돼 있던 상품과 서비스 가격을 자유화하고 급격한 민영화를 실시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살인적 초(超)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초래되며 1992년 러시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500%를 넘겼고, 실업이 급증했으며, 국내총생산(GDP)은 전년 대비 14.5%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