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일본 엔화의 실질가치가 5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면서, 수입품 가격이 소비자와 기업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아사히신문, NHK,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엔화의 ① 실질실효환율(REER)은 1995년 4월 150.85이었으나, 올해 1월 67.55로 반 토막 났다. 이는 1972년 6월(67.49) 후 50년 만의 최저치이기도 하다. 1972년보다 일반 근로자들의 평균 소득이 세 배 가까이 올랐지만, 엔화의 구매력이 당시 수준으로 하락한 셈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엔화 실질실효환율 하락이 소비자에게 타격을 주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의 초저금리가 원인”이라며 “엔화의 불균형적인 약세는 수입 비용을 높인다”고 전했다. 아사히신문도 “과거에는 엔화 약세가 일본 자동차 제조 업체나 수출 업체에 도움을 줬지만 현재는 일본 내 제조 업체가 줄고 있어 상황이 다르다”며 “육류, 커피, 콩 등 수입품을 활용하는 외식 업자나 소비자가 이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엔화의 낮은 구매력과 높지 않은 임금은 일본 내 인적 자원 이탈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닛케이 금융전문기자인 나카후지 레이는 책 ‘값싼 일본’에서 “일본이 관광에 의존하는 가난한 국가가 돼가고 있다”며 “일본의 젊고 똑똑한 사람들이 더 나은 임금과 근무조건을 갖춘 직업을 찾아 일본을 떠나고 있다”고 했다.

이토 다카토시 미 컬럼비아대 국제 공공 정책학 교수 현 일본 도쿄 국립정책대학원대학 수석교수, 전 일본 재무성 차관보
이토 다카토시 미 컬럼비아대 국제 공공 정책학 교수 현 일본 도쿄 국립정책대학원대학 수석교수, 전 일본 재무성 차관보


국제결제은행(BIS)은 매월 기축통화들의 명목실효환율과 실질실효환율을 발표한다. 지난 2월 중순 발간된 BIS 자료는 일본 내부에 큰 충격을 가져왔다.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이 1970년 초반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엔화의 구매력도 후퇴한 탓이다. 국제 통화 체제가 브레턴우즈, 스미스소니언 체제 같은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넘어가던 시기의 엔화 구매력과 비슷한 셈이다. 

엔화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일본인은 수입품 가격이 더 비싸진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잇달아 미국, 영국, 싱가포르의 높은 물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 도쿄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으려면 1000엔(8.66달러)만 있으면 되는데, 미국 뉴욕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으려면 20달러 이상을 줘야 한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맥도널드 빅맥 가격도 일본 도쿄의 경우 3.38달러지만, 미국에서는 5.81달러라고 한다. 

단지 식료품뿐만 아니다. 일본의 지하철, 발열 내의(유니클로 히트텍), 5성급 호텔 숙박비 등 다른 상품과 비교해 봐도 그렇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격이 비쌌던 도쿄 부동산은 이제 다른 나라 주요 금융 중심지 부동산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편이다. 

그럼 언제부터, 왜 엔화의 구매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을까.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은 1973년부터 1995년 4월까지 꾸준히 오르면서 두 배 이상 뛰었지만, 그 이후 하락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15년간 지속된 일본의 ② 디플레이션을 원인으로 짚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일본은행(BOJ)의 양적 완화와 초저금리, 이른바 ③ 아베노믹스로 엔화 구매력이 2013년 이후 급격히 하락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겪으며 주요 통화 대비 엔화 명목가치 하락과 실질실효환율의 하락을 겪었다. 일본의 주요 무역 대상 국가들이 2%대 적정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것과 반대 현상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디플레이션과 엔화의 명목가치 하락 원인은 무엇일까. 모두 일본의 생산성 부진에서 비롯됐다. 

실질실효환율 움직임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발라사·새뮤얼슨 가설’에 비추어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발라사·새뮤얼슨 가설에 따르면, 특정 국가의 교역재 생산성이 비교역재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다른 국가에 비해 교역재·비교역재 생산성 증가율 차이가 크면, 해당 국가의 실질실효환율이 고정·변동환율에 관계없이 오른다고 했다. 이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이 1960년대부터 오르기 시작해 1995년 4월에 정점을 찍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고정환율과 변동환율 제도하에서 엔화의 실질실효환율 가치 상승은 발라사·새무얼슨 가설의 전형적인 예로 여겨졌다. 그럼 이 가설은 엔화의 구매력이 1970년 초반처럼 떨어진 것도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 30년 동안 일본 경제는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등 여러 부정적인 쇼크를 많이 겪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일본에서 가장 큰 구조적 변화는 일본 제조업 기업의 생산 시설 해외 이전(오프쇼어링)이었다. 1990년대, 일본의 제조 기업은 무역 갈등을 피하고자 미국과 유럽에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또 많은 일본 기업은 생산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인건비가 싼 다른 아시아 국가로 공장을 옮겼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에도 지속된다. 일본에 은퇴자가 많아지고 노동가능인구가 줄어서 대량생산 또는 노동집약적 방식의 공장을 세울 만한 동인이 줄었기 때문이다. 

자연적으로 일본 내 공장 생산력 또한 부진해졌다. 일본의 실질임금은 20년간 소폭 감소했다. 일본의 실질임금(2015년 100 기준)을 살펴보면, 1970년 60에서 1997년 113으로 증가했으나, 2021년에는 다시 100을 기록했다. 일본의 실질임금 감소는 결과적으로 구매력 상실로 이어졌다. 

유통·호텔·엔터테인먼트·교육 등 일본의 비교역 분야에는 쇠퇴하고 있는 사업, 유망한 사업이 모두 포함돼 있다. 문제는 과거와 달리 교역 분야와 비교역 분야의 생산성 차이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발라사·새무얼슨 가설에 빗대어 보면, 일본의 교역·비교역 분야 생산성 차이 감소가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의 하락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더 뚜렷해지고 있다. 일본 수출 기업은 1990년 중반까지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향상돼 엔화의 명목가치 절상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생산성이 하락하면서 더 이상 엔화 가치 상승을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이는 사업장의 해외 이전을 가속화했다. 

게다가 일본의 사회보장 지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정부의 교육·과학·인프라·국방 부문 예산이 제한되고 있다. 결국 생산성 향상에 도움 될 수 있는 기초적인 연구 능력도 약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엔화의 실질실효환율 하락 원인으로 일본은행의 통화 정책을 짚어선 안 된다. 엔화의 구매력 하락은 교역 부문에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생산성과 정체된 임금이 문제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Tip

한 나라의 화폐가 상대국 화폐에 비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이 있는지를 나타내는 환율이다. BIS가 세계 60개국 통화에 대해 상대국 간 환율과 무역 거래량, 물가 차이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산출한 가치다. 2010년을 100으로 보고 100보다 높으면 기준 연도보다 화폐 가치가 고평가됐다는 뜻이고 100보다 낮으면 해당 통화의 구매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 전반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 인플레이션율이 0% 이하이면 디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이 떨어지는 현상인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이나 경기가 불황인 디프레션(depression)과는 다른 개념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경기 부양책. 유동성 확대를 통해 20년간 지속된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겠다는 게 골자. 일본은 1990년대 부동산 시장에 형성된 거품이 무너지면서 디플레이션 현상과 극심한 장기 침체를 겪었다. 장기 불황으로 기업이 돈을 벌 수 없으니 임금을 올리지 못하고, 소비가 늘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물가가 유지되는 현상이 지속됐다. 아베는 이런 경기 침체를 해소하기 위해 연간 물가 상승률 2%를 상한선으로 정하고 과감한 통화 공급 확대, 엔화 평가 절하, 인프라 투자 확대 재정 정책, 적극적인 경제 성장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은 2012년 말부터 무제한 양적 완화를 10년 가까이 실시했지만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엔화가 시중에 남아돌았지만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가계가 주택 자금을 빌리려 하지 않은 탓에 일본 경제는 살아나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잃어버린 30년’으로 바뀌었다.

이토 다카토시 / 정리 : 안소영 기자, 김보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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