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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윤덕룡 KDI 초빙연구위원 전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유럽인들은 지쳐있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경제적으로도 피폐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그나마 연합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사회주의 블록을 만들면서 동서 양 진영으로 분리돼 유럽 지역에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배태되고 있었다. 유럽은 이제 미국이라는 세계 경찰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힘으로 평화를 지킬 수 없게 된 현실을 맞닥뜨렸다. 프랑스와 영국 지도자들은 소련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과 독일의 재무장 가능성을 해결하지 않으면 유럽의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고 인식해 해결방안의 모색에 골몰했다. 

이 시기 프랑스 경제계획청장이던 장 모네(Jean Monnet)는 유럽의 평화를 근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기존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민족국가적 경계를 허물고 통합된 유럽국가 건설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유럽통합의 비전이다. 당시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던 로베르 슈만(Robert Schuman)은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슈만플랜(Schuman Plan)’으로 알려진 유럽통합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슈만플랜은 유럽에 기존의 국제관계 틀을 완전히 바꾸는 혁명적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별 국가의 주권을 일정 수준 포기해야 하는 초국가적 공동체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둘째, 상호 간 이해관계를 교환하는 협상이 아니라 ‘윈윈’할 수 있는 협력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셋째, 승전국이나 패전국 지위를 비롯해 국력의 차이에 상관없이 참여국들에 평등한 권한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패전국들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요구했던 관행과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방식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유럽국가를 하나로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슈만플랜을 구체적으로 현실에 옮긴 첫 사업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당시 에너지의 대표적 원천이던 석탄과 산업발전의 기반인 철강은 경제력만이 아니라 군사력의 핵심 기반이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 지역인 자르(Saar) 지역과 루르(Ruhr) 지역은 석탄과 철강 광산이 분포돼 이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장 모네는 석탄과 철강의 생산과 판매 등을 유럽국가들이 초국가적 기구를 만들어 공동으로 관리함으로써 전쟁을 막고 공동번영을 추구하자는 프로젝트를 첫 번째 사업으로 제안했다. 이 제안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등 6개국이 찬성해 1951년 파리조약을 체결하면서 유럽통합은 현실이 됐다. 

이후 유럽국가들이 1957년 로마조약을 통해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AEC)를 도입했고 유럽공동체(EC)를 거쳐 오늘날의 유럽연합(EU)으로 발전하게 됐다. EU는 현재 27개 유럽국가가 참가하고 있으며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 됐다. 2012년 EU는 평화에 대한 기여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인간의 근원적 지향을 파악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한 장 모네의 공로다.

구(舊)소련 연방에 속해 있던 중동구 국가들도 평화와 번영을 함께 누리고자 하나둘씩 EU 가입을 추진해왔다. 우크라이나도 그중 하나다.

지난 2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EU 및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이 자국의 군사적 입지를 불리하게 할 것을 우려해 군사적 공격에 나섰다.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의 평화와 번영을 향한 꿈은 꺾을 수 없을 것이다. 인류 모두가 지향하는 공통된 꿈이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주권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꿈이 꺾이지 않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