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설명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연합(EU)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히 결속하게 만들었다. 외부의 위기가 통합을 촉진한 것이다. EU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조치로 러시아에 다양한 제재를 가하고 있으며,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마저도 2월 28일(이하 현지시각) 이러한 대(對)러 제재에 동참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 2021년 6월에는 EU가 코로나19로 타격받은 EU의 경기 회복을 돕기 위해 사상 처음으로 EU 공동 채권을 발행하기도 했다. 필자는 위기에 직면한 EU가 이렇듯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으로 다가올 경제적 위기에 충분한 공동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유럽 국가들이 경제를 낙관적으로 전망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치를 취해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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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치아 레이클린 런던 경영대학원 경제학 교수 현 IFRS재단 이사 및IFRS재단 지속가능성기준 추진위원회 위원장,전 유럽중앙은행 연구부장
루크레치아 레이클린 런던 경영대학원 경제학 교수 현 IFRS재단 이사 및IFRS재단 지속가능성기준 추진위원회 위원장,전 유럽중앙은행 연구부장

유럽연합(EU)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서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정치적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향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① 노르트스트림2 사업을 중단하고, 러시아 주요 은행을 ② 은행 간 국제 결제망(SWIFT·스위프트)에서 퇴출하고, 러시아에 대한 최혜국 대우도 박탈하면서 EU 회원국들은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전쟁에 맞서 자신들의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적합한 행동은 아직 취하고 있지 않다.

3월 10~11일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EU 비공식 정상회의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EU 리더들에게 그들이 성취해야 하는 공동의 목표에 먼저 초점을 맞추고, 어떻게 그 목표를 이룰지에 대한 논의는 나중으로 미뤄두자고 촉구했다. 새로운 정책이 나올 때마다 회원국에 가중되는 부담이 증가돼 결국 분열을 초래할 수 있음을 감안한 현명한 제안이었다. 

EU 리더들은 군사·방위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는 의지를 단호하게 표명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올 2월 1000억유로(약 136조원)를 국방비 예산으로 책정할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또 EU는 올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현재 수준의 3분의 2까지 줄이고, 탄소중립을 가속화하기 위해 러시아산 화석연료 의존도를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줄여나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EU 리더들은 경제적 역풍이 빠르게 불어닥치는 현시점에서, 이들이 (경제 측면에서) 다 함께 공동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EU 정책 입안자들은 그들이 직면할 경제적 문제들을 사실상 과소평가하고 있는 분위기다.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유럽

앞으로의 (경제) 과제에 대한 유럽 국가 지도자들의 침묵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 거시경제 전망을 바꾸고 있는 현상황에서 무척 당황스럽다. EU 국가 정부들은 전 세계 그 어떤 국가보다도 국방비 지출을 늘리고, 새로운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고, 에너지 가격이 치솟는 가운데 가정과 기업을 지원하고, 대규모 난민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 지출을 두드러지게 늘려야 한다. 이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상당한 빚을 진 상태에서 유럽 국가 정부는 더 많은 부채를 떠안게 된 것이다. 

인플레이션 역시 문제를 더 키울 것이다. 지난 2년간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며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원자재 가격과 위기 상태에 봉착했던 공급망 정체 현상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더 악화시키고 있다. 결국 국가 채무 부담은 더 가중될 것이고, 실질적인 균형금리가 높아질 가능성도 커지며, 결국 다수 국가에서 금융시장이 분열될 수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리스크에 대비하기 위한 행동을 현재까지 거의 취하지 않고 있다. 그간 EU 집행위원회는 코로나19 경제회복기금에 모인 돈의 활용 범위 조율, 에너지 가격 급등 시 필요할 대출금 확보를 위한 부채 증가, EU 집행위원회 국가 보조금 패스트트랙 승인 절차 도입 등 크게 세 가지 문제를 논의해왔다. 그러나 베르사유궁에서 열린 비공식회의 이후 국가보조금 패스트트랙 도입만이 앞으로 지지받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현재 상황에 안주하는 모습이다. 3월 10일 ECB는 자산 매입을 축소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앞으로 유로존의 거시경제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전망치도 내놓았다. 

ECB는 올해 유로존 경제 성장률을 3.7%로 전망했다. 이는 2021년 12월 ECB가 내놓았던 전망치보다 0.5%포인트만 낮아진 수치다. 2023년 성장률 전망치도 2.8%로, 이 역시 (2021년 12월 대비) 0.1%포인트만 하향 조정됐다. 그러나 EU의 정책 입안자들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유로존 물가 상승률이 올해 5.1%까지 치솟은 후 2023년에는 2.1%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ECB는 유로존에서 곧 ③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ECB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ECB가 내놓은 성장률 전망치는 미래 원유 가격 전망치에 기초한 에너지 가격 동향 분석 결과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원유 시장은 매우 한정된 수의 구매자와 공급자로만 구성된 시장이기 때문에 이 시장만 보고 전망치를 내놓으면 신뢰하기 어려운 결과가 나온다. 


번쩍 정신이 들게 하는 현실 

금융시장은 ECB의 전망을 쉽게 납득하지 않는 분위기다. 유럽 기업들은 이미 공급 부족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고통받고 있다. 실물경제가 아직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 않은 가운데 (시장 내) 모든 신호는 생산 가격을 유의미하게 상승시킬 것으로 보이는 대규모 공급 쇼크 발생을 예고하고 있다. 

1945년 이후 대부분의 경기침체는 전쟁 등 지정학적 위기와 연관된 오일쇼크로 인해 발생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원유 가격이 배럴당 200달러(약 24만원)를 돌파한다면 세계는 1979년 일어난 제2차 오일쇼크처럼 심각한 경기침체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덕분에 1970년대 인플레이션은 가까스로 통제됐지만 경제 성장률은 그 과정에서 상당히 큰 타격을 받았다. 

ECB가 경제 성장과 인플레이션 사이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머지않아 ECB에도 피할 수 없는 암울한 선택의 순간이 올 것이다. 유로존이 경기침체라는 수렁에 빠져도 ECB가 인플레이션에 대한 강경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 결국 양적완화와 양적긴축의 조합이 재정과 경제 성장 양쪽에 무리를 줄 것으로 보인다.

EU가 오늘날 처한 상황은 이례적이다. EU가 현재까지 진행한 러시아 제재로 인해 유동성 문제를 겪을 기업에 제공하게 될 정부 지원금 정책이나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은 충분하지 않다. 유럽 국가 지도자들이 그들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음을 더 빨리 깨달을수록 더 좋다. 

좋은 소식은 EU가 새로운 수단을 도입하고 국가 간 리스크를 분담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등 이례적인 위기를 해결할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 EU는 최초로 시도하는 범유럽 공동 채권 발행으로 차세대 EU 채권 발행 프로그램을 2021년 6월 내놓았다. 5년간 8000억유로(약 1092조원)의 자금을 조달해 향후 코로나19 이후 경기 회복을 돕는 자금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그러나 EU는 연방국가가 아니다. 위기 상황에서 통일된 정책을 실시하기까지 여러 정치적·법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제약은 EU가 오늘날 필요한 행동을 취하게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이례적인 코로나19 위기 대응 정책들을 내놓은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 많은 정책을 쏟아낸다면, 유럽인이 이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볼 수도 있다. 아무리 (코로나19로 인해 한시적으로 실시하는) 이례적인 정책들이라고 말해도 유럽인의 눈에는 앞으로도 반복될 영구적인 정책으로 보일 수도 있다. 

EU 리더들이 현재 약속하고 있는 여러 공동의 국방·외교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EU 국가가 공동의 (최소한의) 경제적인 능력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EU는 이러한 필수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 통치(economic governance)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변동성이 고조된 오늘날 EU는 자신들의 행동이 아무리 이례적으로 보일지라도 유로존에 필요한 조치를 시의적절하고 일관성 있게 실행해야 한다. 

ⓒ프로젝트신디케이트


Tip

노르트스트림2란 러시아 서부에서 발트해 해저를 통과해 독일 해안에 이르는 두 국가를 직접 잇는 가스관이다. 독일은 2012년 노르트스트림2 사업을 시작했으며 2021년 완공 후 독일 정부와 EU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압박이 심했던 올 2월 22일 독일이 해당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은행 간 국제 결제망(SWIFT·스위프트)은 전 세계 은행 간 송금 시스템으로, 1만1000개 이상의 전 세계 금융기관이 안전한 결제 및 주문을 하기 위해 해당 전산망을 이용 중이다. 스위프트에서 퇴출당하는 국가는 외국으로부터 수출 대금을 달러화나 유로화로 받을 수 없다.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란 정체·침체를 뜻하는 스태그네이션(stagnation)과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로, 국민소득이 감소하는 경기침체와 전반적인 물가 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을 말한다.

루크레치아 레이클린 / 정리 : 이소연 기자, 김보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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