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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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창 법무법인 광장 외국변호사 미시간주립대 로스쿨 Juris Doctor, 현 연세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 전 하버드대로스쿨 방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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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국가 간 교역이 증가할수록 상호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지고 이에 따라 전쟁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했다. 물자 공급망이 서로 얽힌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경제적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역이 증가하면 전쟁 가능성은 줄어들 수 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가장 높은 시기인 21세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몽테스키외의 주장은 빛이 바랜 것인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한 국가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상대국에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한다. ‘폭력행위’란 주로 군사적 무력을 의미하지만, 최근 들어 자국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국제통상이 새로운 수단으로 부상했다. 서로 밀접히 연결된 세계에서 상대방의 경제활동을 마비시키는 것이 군사적 무력만큼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무기와 식량 등 병참을 지원하는 군수작전이 실패하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전방위적 경제제재와 수출통제를 받는 러시아가 전쟁에 실패할 확률은 서방과 교역하지 않던 과거 냉전 시절보다 높아졌다. 국제 금융 결제망에서 배제되고, 맥도널드와 애플페이 같은 서방 기업들이 철수하면서 가중된 경제난과 불편으로 러시아 내부에서도 반전 여론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역을 중단해 군사 대응 없이 상대국에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 이유다.


WTO, 다자간 분쟁해결절차의 위기

미·중 간 갈등에 이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가뜩이나 심화한 세계 교역 질서의 위기를 가중했다. 다자 규범의 근간인 세계무역기구(WTO)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일방주의적 조치로 인한 무역전쟁 가능성이 더 커진 것이다. 특히 회원국 간 합의를 도모하고 이견을 해결하는 기능을 제공했던 WTO가 위기를 맞으며 이런 가능성은 한층 증대됐다. WTO 분쟁해결절차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지만, 최종심을 담당하는 상소기구는 정지된 상태다.

1995년 출범 후 WTO는 활발하게 분쟁해결절차를 운용해왔다. 그동안 회원국들은 611건의 분쟁을 제소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설립된 국제사법재판소(ICJ)가 1947년 5월부터 2022년 2월까지 182건의 사안을 접수한 것과 비교하면 3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더 많은 분쟁을 다룬 것이다. 회원국들의 WTO 판정 이행도 모범적이어서 WTO 분쟁해결절차는 안정적 세계 교역 질서 발전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 간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 조약은 약속한 의무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그 가치가 떨어진다. 조약상 의무의 효과적 이행을 위해 분쟁해결절차가 도입되는데, 일반적으로 국제통상협정에는 보복조항까지 포함한 비교적 강력한 절차가 마련돼 있다. 세계 각국은 국제 사회의 평판을 고려해 자국의 조약상 의무이행에 비교적 성실한 편이긴 하지만, 분쟁해결절차를 국가 간 합의를 담보하는 효과적 장치로 활용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WTO는 인류역사상 가장 발전된 국가 간 분쟁해결절차를 구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WTO는 상설 상소기구를 두고 2심제로 운영되며 회원국 간 일방적인 무역보복 조치를 불허하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반드시 분쟁해결절차를 거치도록 한다. 법률가로 구성된 부서를 별도로 설치해 패널과 상소기구를 지원하는 것도 특징이다.

WTO는 회원국 간 분쟁이 증가하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현상일 수 있다고 본다. 분쟁해결절차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원만한 해결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WTO 협정이 전 세계 교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없고, 산업도 급속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협정문에 대한 각자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분쟁 발생은 불가피하다. 만약 분쟁해결절차가 없었다면 일방적인 무역보복이 남발됐겠지만, WTO는 신속하고 상호 만족할 만한 분쟁 해결을 촉진했다.

그러나 낡은 협정을 개정하는 WTO 협상 기능이 약화하면서 회원국 간 이견이 생기면 협상보다는 패널과 상소기구로부터 해석을 구할 수 있는 분쟁을 선호하게 됐다. 언제 타결될지 모르는 협상보다 분쟁을 더 선호했고, 결국 미국이 상소기구의 권한이 비대해졌다는 이유로 위원 선출을 보이콧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각국 보조금 지급·과잉생산에 통상분쟁 가능성 커져

WTO가 위기인 상황에서 최근 각국이 경쟁적으로 제공하는 산업보조금은 과잉생산을 유발해 보조금 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 그동안 상대국의 보조금 지급에 문제를 제기하던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비롯해 일본 등도 보조금 경쟁에 뛰어들었다. 미국은 반도체에 60조원 이상, 배터리 산업에 15조원 이상을 지원할 예정이다. EU는 60조원가량을 반도체 산업에 지원할 예정이고, 일본은 대만 파운드리 업체인 TSMC의 생산시설을 일본에 건설하는 대가로 약 5조원의 지원을 검토 중이다.

WTO 보조금협정은 정부의 부당한 지원으로 시장 질서가 교란되는 것을 금지하자는 취지로 체결됐다. 그러나 글로벌 공급망 관리에 안보가 개입되면서 핵심 산업인 반도체와 배터리 등에 막대한 보조금이 지급되고 있다. 이로 인해 결국 공급이 증가하게 되고, 생산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며 통상분쟁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진다. 철강 제품은 이미 과잉생산으로 인해 미국이 철강 수입을 제한하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발동했고, EU도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도 예외가 아니다.

신냉전이라고 해서 같은 진영끼리 눈감아주고 넘어갈 가능성도 작다. 민간항공기 제작에 오랜 경쟁자인 미국과 EU는 각각 상대국의 항공기 생산 업체인 에어버스와 보잉에 보조금을 지원했다고 맞제소해 20년 가까이 WTO에서 분쟁 중이다. WTO로부터 승인받은 보복 수준만 수조원에 달한다. 미국과 EU는 서로 맞보복하는 것을 잠정 중단했지만, 자국 기업의 이익이 침해되면 장기간의 WTO 분쟁도 불사하며 정부와 기업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미국과 EU처럼 큰 시장을 놓칠 수 없는 우리 기업들은 현지에 생산시설을 보유하지 않는 한, 과잉생산에서 비롯된 보조금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우리 기업들도 보조금 조사를 받을 것이고, 이로 인한 상계관세를 부담하게 될 것이다. 때마침 미국, EU, 일본은 보조금 규범을 강화하고자 보조를 맞추고 있다. 결국 경제안보를 이유로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지만, 공급이 과잉되면 각종 무역규제로 분쟁이 증가할 것이다.


세계 8위 무역대국다운 통상역량 갖춰야

우리나라는 무역의존도가 높은 만큼 이에 걸맞은 통상역량을 길러야 한다. 우선 정부는 분쟁대응과 협상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WTO에 제소된 611건 중 한국이 제소한 것은 21건에 불과하다. WTO 분쟁해결절차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다. 소송 절차라고 해서 꺼릴 필요는 없다. 통상분쟁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행위(business as usual)다. WTO에 제소했다고 외교관계가 단절된 사례도 없다. 미국과 EU는 상호 동맹국이면서도 가장 빈번히 서로를 WTO에 제소했다. 많이 싸워봐야 실력이 늘고 맷집도 강해진다.

또한 전 세계가 일방주의로 휩쓸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현재의 신냉전 구도가 얼마나 지속할지 모르나,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WTO 같은 다자포럼에서 논의를 주도하고, 교역 상대국에는 교섭력을 발휘해야 한다. 위기를 맞고 있는 WTO 분쟁해결절차 개선 방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 쉽지 않은 논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존재감도 높아질 것이다. 다자주의를 강화하자는 주장에 반대할 국가는 없을 것이다.

기업도 통상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대기업조차 국제통상 전담조직을 갖춘 곳이 많지 않다. 수십 년간 전문성을 쌓아온 인력도 드물다.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하는 우리 기업의 교역 구조상 국제통상에 정통한 전문가는 필수다. 2021년 우리나라의 수출입 규모는 약 1조2000억달러로 세계 8위의 교역량을 기록했다. 이에 걸맞은 통상역량을 갖춰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정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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