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근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사법연수원 34기, 전 KCAB Next 운영 위원회 위원, 현 세계한인 변호사회 이사, 현 대한 상사중재원 중재인
이형근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서울대 법학, 사법연수원 34기, 전 KCAB Next 운영 위원회 위원, 현 세계한인 변호사회 이사, 현 대한 상사중재원 중재인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상대로 강력한 경제제재를 시행했다. 이에 러시아는 경제제재가 자국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들로 맞서고 있다. 이런 일련의 경제제재와 제재 대응 조치는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러시아 기업과 거래하는 데 큰 영향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불과 두 달여 만에 완전히 바뀐 사업 환경 때문에 그간 활발했던 우리 기업의 러시아 투자와 진출도 주춤한 상황이다.

그런데 국제 거래를 하는 기업에 이런 리스크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코로나19, 미·중 무역 분쟁, 미국의 이란 핵 합의 탈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등 냉전 붕괴 이후 구축돼 온 세계 경제질서를 파괴하고 불확실성을 높이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해왔다. 이런 사건들은 유가와 환율의 급격한 변동을 초래하고, 공급망을 붕괴시키며, 각국 정부 재정과 무역 정책을 변화시켜 국경과 산업의 경계를 넘어 궁극적으로 전 세계 모든 기업들에 영향을 준다.

기업들은 갈수록 높아지는 불확실성으로 인한 법적, 사업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계약 이행과 관련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분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이 이런 위험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계약상 보호 장치의 중요성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을 것을 기대하면서 계약을 체결하는 기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실무를 하다 보면 분쟁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계약의 중단과 종료, 준거법, 분쟁 해결 조항에 대해 충분한 고민이 이뤄지지 않은 계약서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외부적 요인으로 계약 이행이 영향을 받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당사자들이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에 대비하는 계약 규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대표적인 것이 불가항력 조항이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세계적인 경제, 정치적 상황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사인 간 국제분쟁에서 불가항력이 주장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코로나19, 이란·러시아에 대한 강도 높은 경제제재 시행 등 정상적인 계약 이행을 방해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면서 불가항력 조항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 분쟁 상황에서는 불가항력이나 사정변경 등을 주장할 명확한 법적, 계약적 근거가 없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기업들로서는 불가항력을 주장할 수 있는 사유와 절차, 불가항력 주장의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함으로써 외부적 요인으로 인한 위험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최근에는 경제제재와 같이 특수한 유형의 위험에 종합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계약상 보호 장치를 두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일례로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제재 대상자로 지정되거나 기존 경제제재가 크게 강화되는 경우와 같이 전통적인 불가항력에 포섭되기 어려울 수 있는 사정의 발생만으로도 계약 이행을 중단하고 책임 있는 당사자를 상대로 손실의 보전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 규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계약의 당사자나 이행지 등 계약적 요소가 경제제재의 영향을 받게 될 수 있는 지역이나 산업 분야와 관련된 경우라면 이러한 규정을 계약에 포함할 필요성은 더 커질 것이다.


준거법과 분쟁 해결 조항의 재조명

계약상 준거법이나 분쟁 해결 조항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이는 국제분쟁에서 법원이나 중재판정부가 준거법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타당한 결론을 도출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계약 해석과 집행에 있어 예측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인 준거법과 분쟁 해결 조항은 불확실성의 증가로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국제 거래에서 주로 문제 되는 계약 외적인 위험의 법적 평가에 관한 한 국가 간에 여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불가항력에 의한 면책 여부를 판단함에서도 준거법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특히 미국이나 영국 등 보통법계 국가에서는 이를 당사자 간 합의의 산물로 이해한다. 즉, 계약에 명시적인 근거를 두지 않았다면 당사자들은 불가항력을 이유로 면책을 주장할 수 없고, 불가항력의 내용이나 효과 또한 당사자들이 정한 바에 구속된다. 물론 보통법상으로도 다양한 이행불능 법리가 발달해 있으나,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접근 자체가 복잡하고 생소할 수밖에 없다. 그뿐만 아니라, 불가항력이나 사정변경은 대륙법계 국가 사이에서도 인정 요건과 기준에 있어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영역이기도 하다. 

판단 주체에 따라 계약 이행에 영향을 준 외부적 요인에 부여하는 법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런 판단에서는 정부의 규제 권한을 존중하고 자국 기업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려는 정책적 고려가 개입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같이 경제제재의 객체인 국가의 법원과 미국처럼 경제제재의 주체인 국가의 법원이 경제제재가 불가항력 사유인지 여부에 관해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사업장 폐쇄나 출입국 제한 등 정부 방역 조치의 법적인 의미를 판단함에서도 유사한 고려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적극적인 분쟁 대응 요구

우리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계약 당사자 간 이견이 발생해도 이를 분쟁 해결 절차를 통해 공식화하는 것을 꺼려왔다. 그러나 분쟁에 대한 소극적인 대응은 여러 문제점을 노출시킨다. 다시 불가항력의 예를 들면, 계약에서 예정한 불가항력 사유가 발생했음에도 상대방과의 관계 악화를 염려한 나머지 계약상 요구되는 통지를 적시에 보내지 않아 이에 따른 면책 주장이 제약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 다수의 계약 관계가 연쇄적으로 맞물려 있는 서플라이체인이나 건설 공사에 있어서는 이런 대응이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이 모든 당사자의 계약 이행에 영향을 주는 사유가 발생했음에도 채무불이행 책임이 편면적(片面的)으로만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제재 등 계약 이행에 영향을 주는 외부적 요인은 분쟁 해결 조항에서 정한 절차와 경합하는 다수의 중재 또는 소송이 병행해 진행될 가능성을 키우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러시아는 경제제재로 불이익을 받는 자국 기업이 중재합의나 전속적 관할합의를 무시하고 러시아 법원에 제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놨고, 중국은 외국 기업이 미국 등 제삼국의 경제제재 조치에 협조해 중국 기업에 손해를 가한 경우 중국 기업이 중국 법원에서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불확실성 증가로 인한 사업 환경의 변화는 우리 기업들이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분쟁에 대응할 것을 요구한다. 기존에는 계약상 채무를 불이행한 당사자가 먼저 소를 제기하거나 중재를 신청하는 경우가 드물었다면, 이제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여러 개의 상충하는 판결이나 중재판정이 내려질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법정에서 선제적으로 채무 부존재에 대한 확인과 계약 관계의 해소를 구하고 집행 방어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계약상 책임을 물으려는 입장에서는 경제제재나 제재 대응 조치 등과 관련해 각국이 시행 중인 조치를 고려한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집행 계획을 세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업들로서는 계약 상대방에 대한 분쟁 해결 절차를 밟는 것은 물론, 코로나19나 경제제재 등 특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를 시행 중인 국가를 상대로 투자 중재(ISDS)를 진행하는 방안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가 국제사회 경제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이미 취했거나 앞으로 취하려는 조치는 정당한 보상 없는 수용이나 ‘비우호국’ 투자자에 대한 차별적 대우 등을 구성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